[직업의 세계-15] 위조화폐 감별전문가 서태석



"가짜는 내 앞에서 고개를 드네요"


오감으로 찝어내는 인간센서

“기계로는 자석, 철 성분이 들어있는지 정도나 지폐 두께가 다른 정도밖에 가려내지 못합니다. 돈이 낡거나 구겨져도 위조로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큰 도움은 안되지요.”

그렇다면? 사람을 따를 기계가 없다. 외국화폐의 위ㆍ변조 여부를 가리는 위폐감별사.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에 딱 세사람 뿐이다. 그중 두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이 양성하는 후계자들이다. 35년 경력의 서태석(60)씨는 그 중 국내 최초이자 최고로 손꼽히는 위폐감별 전문가다.

서씨는 현재 외환은행 금융기관영업실 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공식적으로 이곳에서 거래되는 31개국 화폐는 물론, 그 외에도 필요와 요청에 따라 국적을 불문하고 화폐의 진위 여부를 판별한다.

직접 확인하는 것만 지폐 매수로 하루 평균 약 1만3,000장. 1차로 감별기를 거친 뒤 손으로 세듯 일일이 만져보며 오감을 동원한다. 종이 재질이나 색상, 인쇄 상태가 어설픈 것을 찾아내는 건 그중 간단한 수준이다. 아무리 감쪽같은 칼라복사라도 전문가의 눈을 속이지는 못한다. 특유의 광택 때문에 굳이 서씨가 아니라도 외환계 근무 대여섯달만 지나면 누구라도 식별이 가능하다.


고유의 비표는 절대 모방 못해

무심한 듯 빠른 속도로 지폐다발을 세어 넘기고 있던 서씨가 이따금 다발안에서 한 장씩 툭툭 빼놓기 시작한다. 서씨의 레이다에 걸린 것들이다. 확인해 보면 영낙 없다. ‘인간센서’로 살아온 백전노장의 기술이다.

“2주쯤 전에는 인도 루피 위폐를 발견했는데, 어찌나 잘 만들었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진폐랑 똑 같았습니다. 아주 정교했어요. 만약 다른 은행에 맡겼으면 열이면 열 다 그대로 환전해 줬을 겁니다. 타 은행에는 감식전문가 자체가 따로 없거든요.”

그런데 무슨 수로 그는 위폐임을 알았다는 것인가? 답은 ‘비표’(秘標)에 있다.

“다른 건 100% 똑같이 모방을 해도 화폐마다 숨어있는 고유의 비표는 절대 위조가 안됩니다. 일종의 비밀번호지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천원짜리 지폐에 숨어있는 무궁화 표시 같은 건가요?”

“그건 불빛에라도 보이잖아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전문가만 아는 게 또 있어요. 그것까지 똑같이 만들자면 조폐공사에 있는 진짜 기계를 가져다놓고 찍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 ‘비표’ 를 알아볼 수 있는 전문가는 국내에서 서씨가 유일하다. 그의 실력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 2000년부터 그는 미국 수사당국의 요청으로 현지와 직통 라인까지 개설, 아시아권의 화폐 위조범죄 해결에 전진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96년에는 금융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감별기와 경쟁 테스트까지 거쳐 실제로 기계보다 빠르고 정확한 판별실력을 입증했다.

서씨가 이 일에 인연을 맺은 것은 군복무 시절부터다. 64년 미 7사단 카투사로 배속돼 미군 장교 아래 경리사병으로 3년 6개월간 근무했다. 미군들의 월급과 환전 등을 맡아보는 일이었다. 어느날 본국에서 갓 파병된 한 흑인병사가 홍콩에서 물건을 사고 거슬러 온 돈이라며 20달러짜리 지폐를 잔돈으로 바꿔달라고 내밀었다.

그런데 서씨 눈에 어쩐지 지폐의 색상도 누런데다 초상화의 인쇄상태도 이상했다. 이를 미국인 장교에게 보고하자 곧 군수사대가 달려와 조사를 벌였고, 지폐의 고유 발행번호를 확인한 결과 위폐임이 드러났다. 이 일로 서씨는 표창을 받고 포상 휴가를 받는 등 작은 이력이 쌓이기 시작했다. 서씨를 신뢰한 미군장교는 화폐 감별의 노하우를 전해주었다.

제대후, 같은 일을 하고 싶어 당시 국내에서 외국 화폐를 취급하는 유일한 은행이었던 외환은행에 입사 지원서를 넣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그럴 것이, 당시 명문대 출신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치열했던 이 곳에 그는 애초에 지원자격부터 미달이었다. 학력이 중학교 중퇴. 마음을 돌리려고 1년이나 다른 직업도 가져봤지만 미련 때문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굵직굵직한 위폐유통범 적발

결국 2년후 은행의 인사담당자를 직접 찾아가 호소했다. 끈덕진 서씨의 열의에 두 손을 든 인사담당자는 ‘정 그렇다면 일용직으로 와서 한번 일해보라’는 답을 주었다.

69년 일용직 신분으로나마 비로소 외환 출납계에 앉게 된 서씨. 별 기대 없이 그를 받아들였던 회사에선 그가 현장에서 위조 화폐들을 족집게처럼 적발해 내는 것을 눈 앞에서 보면서 조금씩 시선이 달라졌다. 채용된 초창기, 한 흑인이 찾아와 내민 5달러짜리가 위조지폐였다.

서씨가 위폐라고 하자 오히려 당사자는 ‘만일 위조지폐가 아니면 당신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 며 되레 협박했다. 주위에선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서씨는 최종 진위를 밝히기 위해 은행내 국제부를 통해 텔렉스로 미국 기관에 돈의 발행번호를 조회했다.

“텔렉스로 조회 결과가 돌아오는 약 10분동안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 만의 하나 정말 내가 잘못 본 거면, 손해배상에다 제 일자리에서도 바로 쫓겨날 테니까요.”

숨막히는 몇분뒤, 미국에서는 진폐가 아님을 통보해 왔다. 서씨의 판독이 그르지 않았다.

74년 필리핀 위폐유통범을 적발한 일이 있다. 일명 ‘16만불 사건’. 양복감을 취급하는 이 필리핀 무역상은 100달러짜리 위조지폐 20만달러어치를 들고 들어와 이미 ‘확인 테스트’ 삼아 남대문 시장은 물론 타 시중은행까지 3 군데나 돌며 위조화폐를 쓰고 온 뒤였다.

이전의 ‘무사통과’에 용기백배해 1,500 달러를 바꿔달라며 서씨가 있는 출납창구에까지 멋모르고 찾아든 것이다. 서씨가 위폐로 판정하자 ‘감별기를 가져오라’ 며 더 큰소리를 쳤다. 실제로 감별기에 넣어보니 ‘정상’ 으로 나왔다. 상대는 감별기의 맹점까지 이미 간파해 기계를 능가하는 가짜를 들여온 것이다. 끝까지 물러서지 않은 서씨의 주장으로 결국 조사가 진행된 결과, 필리핀인의 숙소에 숨겨져 있던 대량의 위폐 다발이 적발되는 등 사기행각의 전말이 드러났다.

‘200만불 사건’도 있다. 81년 당시 금융가의 핫 뉴스로 대서특필된, 영화같은 사건이다. 외환은행측이 홍콩시장에서 사들인 화폐 200만불이 5포대의 돈자루에 실려 도착한 상황, 그런데 돈자루의 무게가 어쩐지 가볍다며 서씨가 곧바로 제동을 걸었다.

바로 한 포대를 뜯어보니 지폐 대신 종이다발만 수북했다. 희대의 사기극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의 FBI까지 출동해 한미 합동 국제수사극으로까지 전개됐던 이 사건은 결국 현금수송을 맡았던 용역업체가 공항에서 바꿔치기 한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뜨거운 화제를 뿌리며 대단락이 지어졌다.

암달러상과 거래하다 경찰의 대공수사망에 걸린 한 재미교포의 돈 약 13만달러가 위조지폐임이 서씨에 의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고, 얼마전 있었던 인도 루피 위조사건도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사업가가 자칫 거래상대에게 속아 대형 피해를 입을 뻔한 것을 그가 도중에 막아준 셈이었다.


수사기관서도 수시로 감정요청

화폐위조사건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다 보니 경찰이나 검찰,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으로부터 수시로 감정 요청을 받거나 재판에 참고인 자격으로 불려다니는 일도 잦다. 범죄에 연루된 브로커나 그 ‘어깨’들로부터 협박을 받기도 예사. 이들은 서씨를 직접 찾아오거나 법원에 증언하러 가는 날 복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을 잘못 하기만 하면 알아서 하라’며 살벌한 위협을 퍼붓기도 한다. 자신의 시간과 돈까지 써가며 묵묵히 봉사해 온 댓가치고는 안팎으로 씁쓸한 일들이 많다.

“어차피 민간인으로서 봉사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앞으로 외환시장이 완전개방 될 때를 대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이에 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소관 부처도 하나로 통일해서, 경찰이든 검찰이든 화폐위조에 대한 담당창구를 단일화해 자체적으로 위폐감별 전문가를 육성하고 보유해야 할 때입니다.”

73년 정식직원으로 임용된 서씨는 83년 청백봉사상을 받았다. 그리고 98년 IMF 상황으로 금융가에 구조조정 태풍이 몰아쳤을 때 그는 일생에서 가장 아찔하고도 감격스러운 고개를 넘었다.

“당시 각 사원들에게 인사고과 평점을 통보해 점수가 C등급과 D등급이면 스스로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게 온 통보를 보니 C등급이었습니다. 결국 사표를 낸 뒤 몹시 상심해 있는데 회사에서 좀 보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C등급이라 사표를 내라길래 이미 냈다’고 하자 ‘아무리 구조조정이라도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은 남아야 한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 필요한 사람’ 이라며 사표를 반려하시더라구요. 그때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분야를 열심히 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2년전 정년 퇴직을 맞은 서씨는 그후에도 회사의 요청으로 재계약, 최근에는 TV광고에까지 등장하는, 사실상 자사의 간판스타로 뛰고 있다. 매일 드나드는 근무지 한 켠에는 4년전 서씨가 만든 위조화폐 박물관도 아담하게 자리해 있다. 96년에는 사내 공모를 통해 2명의 후계자가 발탁돼, 이들 또한 올해로 7년째 서씨 곁에서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비표 판독기술 후계자에게 물려줄 것

하지만 이들도 서씨의 비표 판독 기술만큼은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서씨는 은퇴하는 날 이것을 선물로 물려줄 생각이다. 대체 비표가 뭐길래? 호기심을 참지 못해 스무고개까지 벌였지만, 역시 어림도 없다. 세계의 일곱 손가락 안에 드는 노장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글자인가요 기호인가요?”

“글자예요”

“몇글자?”

“8글자”

“나라마다 그 위치가 다 똑같아요?”

“위치는 다 비슷하고 글자만 그 나라 언어로 돼 있어요.”

“다른 글자처럼 인쇄된 채로 섞여있는 건가요?”

“인쇄된 게 아닙니다. 색깔이 투명이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보세요?”

“정확히 위치를 알고 보면 볼 수 있어요.”

“앞면에 있나요 뒷면에 있나요?”

“앞면”

“…”

“눈앞에 있어도 안 보일 거예요.”

정영주


입력시간 : 2003-10-07 13:51


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