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르네상스시대, 권모술수의 희생양

[역사속 여성이야기]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화려한 르네상스시대, 권모술수의 희생양

막강한 권력의 중심에 어쩔 수 없이 오르게 된다면 그 힘을 움켜쥐고 당당해지던가 혹은 멀리 도망가 초연해져야만 한다. 권력의 가운데 서서 스스로의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과 타인의 삶을 크게 망친다. 유럽의 가장 찬란하면서도 뻔뻔스러운 부도덕의 시대였던 르네상스.

그 시절 가장 빛나는 권좌 바로 옆에 있으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세우지 못해 권력에 휘둘리며 불운한 삶을 살았던 여성이 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르네상스 최고의 여인이면서 언제나 불운했던 그녀의 비극은 너무 잘 난 아버지와 오빠를 둔 데서 시작되었다.


아름답고 순종적인 교황의 사생아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480-1519)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사생아였다. 정치적인 음모와 살인, 배덕과 배신이 판을 치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가장 성스러워야할 교황의 지위도 정치적인 수완과 부도덕에 의해 결정되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6세도 당대 최고의 권모술수가로서 교황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종교적 순결과 신에 대한 헌신은 그야 말로 헌신짝 같은 것이었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여러 명의 정부를 거느렸으며 그 중 가장 총애했던 정부가 이미 남편이 있었던 반노차 카타네이였다. 반노차 카타네이는 25년 간을 알렉산드르 6세의 정부로 있으면서 4명의 아이를 낳아 길러냈다. 그 첫째가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이자 르네상스 최고의 남자로 일컬어지는 체사레 보르지아이고 루크레치아는 셋째였다.

한번 보면 그 누구라도 찬사를 바치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지닌 가냘픈 루크레치아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다. 게다가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 체사레의 명령이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어가던 언제나 조용히 순종하는 여인이었다.


인생을 좌우했던 아버지와 오빠

루크레치아의 아버지 교황 알렉산드르 6세는 오로지 자신의 보신과 보르지아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세상 모두를 희생해도 괜찮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루크레치아의 큰 오빠 체사레는 정치적 야욕을 위해서라면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혈육을 살해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기가 센 두 남자 사이에서 루크레치아는 그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희생양이 되었다.

아버지와 큰오빠 두 남자가 루크레치아를 가장 적절히 이용한 것은 바로 루크레치아의 결혼을 통한 정략적 제휴였다. 그 속에서 루크레치아는 스스로 아무런 의사로 표명하지 못한 채 보르지아 가문의 남자들을 위해 반항 한번 없이 이리로 저리로 끌려 다녔다.


세 번의 정략결혼

루크레치아의 첫번째 결혼은 그녀가 여인으로 자라기도 전인 11세에 서류 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페사로 지방과의 연맹이 필요했던 알렉산드르 6세는 딸을 페사로의 공작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시킨다. 그러나 이 결혼은 얼마가지 않아 종지부를 찍는다.

페사로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지방의 영주와 연대가 필요했던 보르지아 가문의 남자들은 루크레치아의 첫번째 결혼을 교황인 아버지 알렉산드르 6세의 권세를 이용해 무효라고 선언해버린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를 나폴리의 알폰소 다라곤, 즉 비셀리 공작과 결혼시킨다.

비셀리 공작은 루크레치아를 몹시 사랑하였다. 루크레치아도 이 결혼 생활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루크레치아의 행복은 그녀의 큰오빠 체사레와 남편 비셀리 공작과의 불화로 인해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체사레는 이제 정치적으로 쓸모가 없어진 매제 비셀리 공작을 잔혹한 암살로 제거한다.

루크레치아는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힘껏 간호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남편을 살해한 오빠에게도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 모든 상황을 담담히 수용한다.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이기 이전에 비열하고 대담한 보르지아 가문의 한사람으로써 개인적인 비극을 감내해야 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세번째 결혼은 당시 체사레에게 가장 필요한 세력이던 페라라의 알폰소 데스테와 이루어졌다. 그녀는 보르지아의 남자들이 시키는 결혼을 무심하게 받아들이고 결혼생활에도 무심하게 적응해갔다. 결코 안정적이지도 않고 보르지아 가문의 필요에 의해 여차하면 깨어질지도 몰랐던 그녀의 세번째 결혼은 18년 간 이어졌다. 다행히도 그녀의 친정인 보르지아 가문이 몰락했기 때문이었다.


친정의 몰락

보르지아의 몰락은 당시 로마?휩쓴 말라리아와 함께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르 6세나 체사레 보르지아의 강력한 야심과 정치적 계획 속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던 질병이 보르지아 가문을 덮친 것이다. 알렉산드르 6세와 체사레는 동시에 말라리아를 앓게 되고 알렉산드르는 고령을 이기지 못해 숨을 거두고 만다. 보르지아 가문의 세력이 전 유럽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을 때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교황이던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이 사라진데다 말라리아로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동안 체사레의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전 유럽을 호령하던 보르지아 가문의 입김이 서서히 영향력을 잃어가더니 급기야 체사레 또한 유럽의 궁벽한 곳에서 명예롭지 못한 전투로 전사하고 만다.

보르지아 가문의 몰락은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일어났다. 알폰소 데스테의 아내 루크레치아의 위치 또한 불안하기 짝이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친정의 입김에 의해 결혼생활을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친정의 몰락으로 시댁에서 내침을 받을 처지가 된 것이다. 그때 루크레치아를 보호한 것이 그녀의 남편 알폰소 데스테였다. 그는 남자다운 용기와 결단으로 루크레치아를 감싸안았다.


삶이 자기 것이 아니었던 여인

르네상스를 풍미한 보르지아 가문은 교황 알렉산드르 6세부터 체사레와 루크레치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명예롭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 알렉산드르 6세는 가장 세속적인 그리스도, 즉 타락한 교황으로 불렸고 체사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루크레치아는 팜므 파탈의 요부로 일컬어졌다.

알렉산드르 6세와 체사레에 대한 평가는 정당할지도 모르나 루크레치아에 대한 평가는 어쩐지 부당하게 보인다. 그녀는 오로지 순종적으로 가문의 명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었다. 타락한 권력의 옆에 있으면서 이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스스로 멀어지지도 못한 채 그대로 순종한 것이 그녀의 죄라면 죄일지 모르겠다.

입력시간 : 2003-10-07 17:14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