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갈증에 목마른 골수 '쟁이'연극판서 잔뼈 굵은 연기파, '작가주의 배우' 닉네임도

[스타탐구] 추상미

연기 갈증에 목마른 골수 '쟁이'
연극판서 잔뼈 굵은 연기파, '작가주의 배우' 닉네임도

몇 년 전 아침 드라마에서 그녀를 보고 짐짓 놀란 기억이 난다. 신문사 경제부 기자인 듯 한데 담당 출입처를 돌며 기사거리를 찾는 그의 모습이 제법 기자 같았다.

“음… 지금까지 기자 연기한 배우 중에는 그래도 젤 낫네.” 유난히 짙은 눈동자와 이국적인 마스크, 똑 부러지는 목소리 때문인지 주로 현실적인 커리어 우먼을 맡아 연기해온 추상미. 영화와 드라마, 또 연극무대를 오가며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딱히 미인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무엇하지만 ‘매력적이다’라는 말은 맞춤 옷처럼 꼭 들어맞는 그를 만나보자.

영화 ‘접속’이 한창 인기를 끌 무렵, 소설을 쓰는 친구와 극장을 찾았는데 영화가 끝난 후 친구가 말하길, “이상해. 다른 사람 연기는 하나도 안 들어와. 왜 저 여자가 저렇게 눈에 띄지. 거참, 묘한 배우네.” 남자 주인공 동현(한석규)을 짝사랑하는 방송작가 은희로 얼굴을 비친 추상미였다.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한석규, 전도연 틈에 가려 자칫 평범히 묻힐 수도 있었지만 어찌나 그 카리스마가 비범한지 영화가 흥행하면 할수록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난 것인지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연기는 마치 오래된 중견배우를 뒤늦게 발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마저 들게 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는 대학로에서 뒹군 연극배우 출신이었고, ‘로리타’ ‘제국의 광대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굵직굵직한 연극에서 이미 그 명성을 날린 바 있는 골수 딴따라였다.

오랜 시간 연극판을 오가다 우연찮은 기회에 영화에 출연하게 됐는데 엄밀히 말해 그의 정식 데뷔작은 장선우 감독의 ‘꽃잎’. 주인공 이정현을 찾아 다니는 무리인 ‘우리들’의 한 멤버였는데 대사가 거의 없는 단역이어서 그의 얼굴은 기억되지 않는다.


유년시절 기억 '아버지 추송웅'이 지배

알만한 사람은 다 알 듯이 그의 아버지는 연극배우 고 추송웅이다.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유명한 추송웅은 살아생전 온 몸을 던지는 불꽃 같은 연기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그의 유년시절 기억을 지배하는 것도 아버지다. 유난히 막내딸을 예뻐하던 아버지는 공연 마다 그를 데리고 다녔고 또래 친구들 대신 연기하는 언니, 오빠들하고 어울려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렇게 사춘기를 맞을 즈음, 아버지가 훌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없이도 태연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야속해, 극장을 행동 반경에서 멀찍이 밀어내고 평범한 문학도의 길을 택했지만, 연극부원 공고문에 깊숙이 박히는 눈길은 어쩔 수 없었다. 분장도구의 분냄새, 세트에 핀 곰팡이 냄새, 조명 불빛의 따스함. 어릴 적 무대 위에서 놀던 오감의 기억이 살아나는 걸 느꼈다.

“데뷔 초만해도 누구의 딸로 알려지는 것이 부담되기도 했어요. 연기자 2세라는 말도 버겁구요. 근데 피는 정말 못 속이나봐요. 길거리에 붙은 연극 포스터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그를 따라붙는 수식어 중에 하나가 ‘지적이다’는 말이다. 그가 과연 얼마나 지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똑똑해 보인다. 불문학을 전공한 이유인지 대화 중에 툭툭 내뱉는 말들에는 받아 적고 싶은 표현들도 종종 있고 극중에서 뿜어내는 대사들도 충분한 자기 이해와 고민 속에서 나오는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말하면 다 절실해진다.


서늘하고 열정적인 야누스적 매력

아담한 체구에서 발산되는 야누스적인 매력도 그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다. 서늘한 아름다움 위로 뜨거운 열정이 배어 나오고, 순하고 밝은 웃음 뒤로 고독과 슬픔이 오버랩된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얼굴은 질리지 않는 깊은 인상을 주며 무슨 역을 하든 그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처음 저를 보신 분들은 말 붙이기도 어렵다고 하세요. 제 인상이 좀 강한가 봐요. 항상 야무지고 뭐 그렇지도 않아요. 실수도 많고 덤벙대기도 잘 해요.”

최근 들어서는 저예산 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면서 작가주의 배우라는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영화 ‘미소’에서의 망막색소변소증에 걸린 사진작가 소정 역할과 늘 자살을 꿈꾸는 ‘파괴’에서의 행위예술가 마라 역할은 고민하고 사유하는 배우 추상미의 실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캐릭터들이다.

톱스타이면서도 최소의 개런티만 받고 역할 비중에 상관없이 오로지 작품성만 쫓아 출연한 그의 결정은 인기와 돈만 좇는 배우들이 득세한 충무로에 신선한 귀감이 되기도 했다.

늘 목 말라 있는 연기갈증을 채워주는 건 역시 연극이라는 생각에 얼마 전엔 ‘프루프’라는 연극에도 출연했다. 천재수학자의 딸 캐서린 역할이었는데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상대배우가 앉아있던 의자가 폭삭 주저 앉는 사고가 있었지만 추상미의 열연으로 그것 마저 의도된 연출로 관객들이 이해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작가주의 영화와 연극만 하고 있다고 대중적인 인기를 못 얻느냐? 그것도 아니다. 방송 3사 시청률 1위를 점유하며 막을 내린 ‘노란 손수건’은 조민주라는 캐릭터만큼이나 확실하고 강렬하게 그를 알린 작품이 됐다. “거침없는 배우보다는 항상 고민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추상미라는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는, 그런 배우말이에요.”

10년 가까이 연기활동을 하며 ‘연예계’라는 곳에 속해있지만 날마다 그는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방송과 영화, 연극을 오가는 것이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기회만 된다면 아직 채 표현하지 못한 열정의 끝자락을 펼쳐보이고 싶다. 연기가 주는 감흥에 가슴 뻐근한 전율을 느끼고 싶다. 그의 영원한 질투의 대상, 아버지처럼 말이다.

글 김미영 자유기고가


글 김미영 자유기고가 minju@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