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자에 허덕이는 증시 독립리그, 투자자 "위험한 시장"인식

ECN, 그들만의 쪽박잔치?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증시 독립리그, 투자자 "위험한 시장"인식

올빼미 투자자들의 호응과 함께 ‘메이저리그’(거래소, 코스닥)를 뒷받침하는 ‘마이너리그’로서의 역할 정도는 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개장 이후 일 평균 주식거래대금이 40억원을 조금 넘을 정도로 맥을 못 췄지만 상하 5%의 가격 변동 허용은 상당한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바람이었다.

“가격 변동제 도입으로 주가에 영향을 주는 각종 재료가 제 때 주가에 반영되면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질 것이고 거래대금이 지금보다 20~25배 정도 늘어날 것이다.” 야간 증시라고 불리는 장외전자거래시장(ECN)을 운영하는 한국ECN증권 이정범 대표는 당시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ECN 시장에 가격 변동제가 도입된 지 벌써 3개월 가량. 허나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가격 변동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야간 주식 투자에 참여하는 이들은 미미했다. 결국 ECN 시장은 ‘마이너리그’에도 못 미치는, 늘 적자에 허덕이는 ‘독립(인디펜던트) 리그’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끝나지 않은 투자 기회

국내에 야간 증시가 문을 연 것은 2001년 12월27일. 증권거래소와 코스닥 시장 등 정규 시장이 끝난 시간(오후 4시30분~오후 9시) 당일 종가로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는 또 한번의 투자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거래가 가능한 종목은 거래소의 ‘KOSPI 200’과 코스닥의 ‘KOSDAQ 50’ 구성 종목 등 총 250 종목이었다.

하지만 가격 변동을 전혀 허용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첫 걸음이었다. LG투자증권 김성수 연구원은 “주식 시장 본연의 기능인 ‘가격 발견’(Price Discovery) 기능을 아예 차단함으로써 시장 존재의 가치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라고 했다. 시장 개설 초기인 2002년 1월 1,500억원을 넘어섰던 거래대금은 그 해 6월 483억원으로 30% 수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올 6월까지 일 평균 거래대금은 44억원 가량. 거래소와 코스닥 등 정규 시장 거래대금의 0.1%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당연히 한국ECN시장은 만성 적자에 시달렸다. 지난 회기(2002년 4월~2003년 3월)에 당기 순손실이 22억원에 달했을 정도다.

ECN 시장 활성화를 위해 가격 변동제가 도입된 것은 올 6월23일. 한국ECN시장측은 “사실상 제2의 개장”이라며 환호했다. ‘끝나지 않은 투자 기회’라는 구호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는 기대였다. 거래 방식은 이랬다. 당일 종가를 기준으로 상하 5%의 가격 변동을 허용하되 30분 간격으로 하루에 9번 랜덤엔드(Random-end) 방식으로 거래를 체결하는 것.

매시 25~30분, 55~00분을 체결 구간으로 해 컴퓨터가 무작위로 난수를 발생시킨 뒤 체결 구간 내에서 불특정하게 시점을 생성, 그 시점에 매매를 성립시키는 방식이었다. 허수 호가를 이용한 시세 조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한 증권사 관계자는 “유럽 증시의 결과가 시세에 반영될 수 있기 때문에 ECN 거래가 크게 증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높은 기대감을 표시했다. 더구나 잘만 하면 야간 거래를 통해서도 최대 10%의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셈이었다.


가격 변동 허용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가격 변동제의 효과는 그리 대단하지도 않았고, 또 오래 가지도 않았다. 6월 766억원이던 거래 대금이 7월 두 배에 가까운 1,325억원으로 뛰는가 싶더니 8월 1,125억원, 9월 845억원 등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10월 들어서도 9일까지 거래대금이 233억원에 불과한 실정이다.

가격 변동 이후 8월말까지 2개월여간 ECN시장의 중개 수수료 수입은 고작 4,500만원 정도. ECN시장 기획팀 서민정씨는 “가격 변동 이전보다 별로 나아진 것은 없으며 계속 적자만 누적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31개 증권사가 출자해 설립된 ECN증권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1만분의 0.85인 중개 수수료. 1억원 어치의 거래가 이뤄질 때 매도자와 매수자 양측에서 8,500원씩, 총 1만7,000원의 수수료를 받는 꼴甄? 하루 거래량이 지금보다 2배 이상 늘어 100억원 어치라고 해봐야 하루 벌어들이는 수입은 170만원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ECN 시장 부진의 원인을 구조적인 한계에서 찾는다. 가격 변동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다음날 주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투자자로서는 매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특히 30분 간격의 일괄매매 방식은 주문 후 체결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어 투자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당일 시세 차익을 남기는 데이트레이딩(단타 매매)을 사실상 봉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유럽 증시의 결과가 반영될 수 있다는 장점도 그다지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굿모닝신한증권 홍성태 투자분석부장은 “우리 주식 시장이 유럽 증시보다는 미국 증시에 훨씬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며 “미국 증시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의 개장에 앞서 ECN이 마감됨에 따라 투자자들의 입장에서 ECN은 위험이 큰 시장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개장 초기 그나마 전체 거래의 3% 정도 수준에서 시장에 참여했던 기관과 외국인들의 발길이 요즘 들어서는 아예 뚝 끊겼다는 것. ‘개미’들만이 ECN 시장의 유일한 고객이었다. 홍 부장은 “거래량이 적기 때문에 기관과 외국인이 시장 참여를 꺼리게 되고 따라서 거래량이 늘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 ECN 시장은?

물론 ECN 시장의 전망이 부정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기업들이 장 마감 이후 부정적인 각종 공시들을 슬그머니 쏟아내는 ‘올빼미 공시’를 저지할 수 있는 효과만으로도 ECN 시장의 존재 가치는 충분할 수도 있다. 금융감독원은 올 초부터 공시 접수시간을 ECN 마감 시간에 맞춰 9시까지로 늘렸다.

가격 변동 허용 이후에도 ECN 시장이 활성화하지 못했던 것은 9월 이후 전반적인 증시가 침체 국면이었던 데도 한 원인이 있다. 다시 말해 주식 시장이 다시 활황을 타게 되면 가격 변동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거래가 증가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표적인 ECN 시장인 ‘Island’와 ‘Archipelago’의 시간 외 거래 일중 평균 거래 비중이 정규 시장 대비 2.3%, 2.7%에 달하는 점을 거론하며 적어도 시장이 신뢰를 쌓게 되면 차츰 거래가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ECN시장이 손익 분기점을 넘기 위해 필요한 하루 거래대금은 1,200억원 가량. 적어도 지금보다 30배 가량은 거래가 늘어나야 가까스로 만성 적자를 탈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ECN 시장 임병출 대리는 “거래 대상 종목 확대, 30분 단위 단일가 매매 방식 변경 등 시장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내부 검토를 하고 있다”며 “제도 변경이 있기 전까지 당분간 고전은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0-16 11:18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