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으로 내몰린 명예퇴직자, 시련과 좌절의 나날

[명퇴… 97년, 그리고 2003년] 마르지 않는 눈물
세상 밖으로 내몰린 명예퇴직자, 시련과 좌절의 나날

그들의 눈물은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1997년’으로 대표되는 그 해, 정든 직장을 쓸쓸히 등진 그들은 지금껏 철저히 혼자였다. 적잖은 명예 퇴직금을 받은 이들도 있었지만, 안정적인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고서 빈 손이 되는 것은 그저 시간 문제였다.

가진 돈을 모두 쏟아 부어 생전 처음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쓴 맛을 봐야 했고,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던 연약한 손으로 공사장에서 벽돌을 들어 나르다 몸져눕기도 해야 했다. 세상과 높은 벽을 쌓은 이들과 연락이 닿는 것도, 또 힘들었던 그간의 생활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도 쉽지 않았다. 5~6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명예 퇴직’이 과거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인 듯했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경기 수원 경기도청 뒤편에 자리잡은 팔달산 입구. 평일 오전 시간인데도 흰색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완연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하는 이들이 적잖이 눈에 띈다. 새벽까지 마신 술 때문에 30분 정도 약속에 늦었다는 정종민(51ㆍ가명)씨는 벤치에 앉자 마자 그들을 가리키며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아마 저 사람들도 해고를 당하거나 명예 퇴직한 사람들일 거요. 외환 위기 직후에는 산 한 구석에 술자리를 펴놓고 혼자서 막걸리를 들이 붓는 사람이 숱했죠.” 동병상련의 감정이거나 혹은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인 듯했다.

정씨가 10년 가까이 몸 담았던 회사를 그만둔 것은 98년 초순이었다. 아내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아들, 수원의 35평 아파트, 대기업 계열 정보통신 회사 엔지니어링 파트 부장, 연봉 5,000만원 안팎.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남 부럽지 않게 살아갈 정도는 됐다. 그런 그에게 명예 퇴직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미 중간 정산을 받은 터라 퇴직 때 손에 받아든 돈은 고작 4,800만원 가량. 컨설팅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별 재미를 보지 못했고, 이리 저리 돈을 빌려 만든 3억원으로 중국 등지에서 냉동 수산물을 수입하는 회사를 차렸다가 적잖은 빚더미에도 앉았다.

“사업이 어려워지니까 돈을 빌려준 친구가 당장 돈을 빼달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매출은 꾸준히 나고 있는 시점이었는데 1억원을 내주고 나니 사업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읍디다.” 힘들 때는 의리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운동도 하고, 친구를 만나서 소주도 마시고….” 집 담보 대출까지 받아 서울 사당동에서 빌라 분양 사업에 잠시 손을 대고 있는 것외에 특별한 직업이 없는 그에게 하루 일과가 정해져 있을 리는 없다. “기업에서 배운 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던 이가 혼자 내버려지니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죠.” 그는 “퇴직 후 단 한 번도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쇼핑몰에서 자동차용품점까지

지금은 현대에 흡수돼버린 기아중공업의 품질보증부에서 꼬박 10년을 헌납했던 고영운(46ㆍ가명)씨.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서 98년 초 쓸쓸히 옷을 벗어야 했다. 퇴직금이라며 받은 돈은 고작 3,000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 앞날의 계획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들.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면, 아니 당장 먹고 살려면 40대 초반의 창창한 나이에 무엇이든 해야 했다. 있는 대로 끌어 모은 돈은 7,000만원 정도.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다. 일본인들을 상대로 김, 고추장, 인삼 등 우리나라 특산품을 파는 것이었다. “업무 차 일본 출장이 잦았는데 일본 사람들이 우리 특산물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3년. 그러나 처참했다. 이것저것 제하고 월 수입 150만원을 넘기기 힘들었다. 아이들 과외나 학원 비용을 대는 것은 배 罐?얘기였고 학교에 가져가는 5만원의 식대를 주지 못한 적도 있었다. 전업 주부였던 아내(42)는 조립 회사, 아파트 베이비 시터 등을 전전해야 했다.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물에 빠졌는데 물이 코 바로 밑까지 차오르는 것이요. 발끝을 들면 살 수 있지만 까치발을 내리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회사에 다닐 때만 해도 생활고로 자살한다는 뉴스가 그저 남의 얘기일 뿐이었는데 그게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고 했다.

다시 직장을 찾았다. 기아중공업에서 모시던 상사가 ‘월급 사장’으로 있는 회사였다. 연봉 2,700만원 가량. 전만은 못했지만 그래도 쇼핑몰을 운영하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하지만 이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경남 창녕에 있던 공장에서 본사인 인천으로 인사가 났다.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아가며 타지 생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에 붙어 있으면 얼마나 있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도 들었다.

지난 7월 고씨는 마지막 모험을 했다. 있는 돈을 모두 털어 넣어 지금 살고 있는 경남 진해에 J튜닝이라는 자동차용품점을 개설한 것. 그나마 친척에게서 26평 남짓한 가게 터를 거의 공짜로 빌린 덕이었다. “지난 5년간 머리가 하얗게 돼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으니 이제 이 가게에 뼈를 묻을랍니다.” 이제 물러나면 끝이라는 절박함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골수암이란 병 뿐

어느 직장보다도 안정적일 것 같았던 은행이었다. 82년 대학을 졸업하고 입행을 한 이후 은행원으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97년, 은행권에 IMF의 한파가 가장 거세게 몰아쳤다. 특히나 그가 다니던 서울은행은 정부로부터 공적자금을 받으며 구조조정 1순위가 됐다. 젊어서 이혼을 하고 노모와 함께 단 둘이 살아가던 홍석표(49)씨는 그렇게 15년의 은행원 생활을 접어야 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위로금을 포함한 2억원에 육박하는 퇴직금. 주변의 친구들은 “평생 먹고 살 수 있겠다”며 오히려 부러워했다. 하지만 화근은 주식이었다.

주식 시장에 이른바 ‘명퇴 부대’들이 대거 몰려들던 즈음이었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자신이 몸 담았던 서울은행 주식을 대량 사들였다. 주가가 계속 떨어지면서 주변의 만류도 심해졌지만 “서울은행이 외국에 팔리면 주가가 크게 뛸 것”이라며 오히려 노모에게 맡겨뒀던 생활비까지 톡톡 털어 물타기까지 했다.

감자(減資)로 휴지 조각이 돼 버린 주식과 함께 그의 꿈은 산산 조각이 났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해보았다. 고물상을 해보기도 하고, 막노동판에 나가보기도 하고, 정규 운전자가 나오지 않는 날 대리로 운전을 하는 ‘스페어 택시 운전’을 하기도 했다. 작심을 하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부동산중개업소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경기 성남에 보증금 500만원에 월 15만원짜리 셋집과 ‘신용불량자’라는 딱지 뿐. 그리고 또 하나, 골수암(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병이었다. 병을 알게 된 것은 지난해 12월.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퇴원과 입원을 되풀이 하기를 몇 번. 의사는 “내년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노모인 이충근(76) 할머니는 가슴 속 깊이 맺힌 한을 풀어 놓는다. “은행이 그 때 아들을 내몰지만 않았더라도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겠지요. 허긴 이제 그런 얘기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들 병원비를 위해 다만 100만~200만원이라도 싼 집으로 옮기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이젠 희망을 말한다

인천 부평구 갈산2동 도심 한 빌딩 지하에 자리잡은 베이비옥션 사무실. 창고를 방불케하는 35평 남짓한 공간은 발 디딜 틈조차 없다. 이곳은 인터넷 경매 사이트 ‘옥션’을 통해 유아 용품을 판매하는 곳. 유모차, 어린이 그네, 블록, 카시트 등 20여종의 용품을 공장에서 직구매해 다른 회사보다 10~30% 저렴하게 판매한단다.

이곳의 사장님이자 유일한 직원인 이성각(42)씨. 그 역시 IMF 당시 회사를 등져야 했던 명예퇴직자였다. 수년간 우여곡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월 수입 400만원이 넘는 비교적 괜찮은 회사의 사장님으로 자리 매김을 했다. 스스로도 ‘성공한 명예퇴직자’로 자부할 정도다.

쌍용시멘트 영월공장에서 자원관리 업무를 맡던 그는 98년 12년간의 정든 직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굳이 명예퇴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모험을 택한 것이었다. 위로금을 포함해 6,000만원 정도 되는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 것도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연히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당시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인 두 아들을 두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시작은 수입 유아완구 대여점이었다. 집 담보 대출, 마이너스 대출, 그리고 지인들로부터의 빚까지 모두 1억3,000만원을 털어 넣었다.

하지만 첫 달부터 적자였다. 하루 매출은 많아야 5만~6만원. 아예 매출이 전혀 없는 날이 더 많았다. 12평 짜리 가게에 월 70만원씩을 내야 했지만 이 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불과 6개월만에 접어야 했다.

손에 쥔 것이 한 푼도 없는 것은 물론 빚만 가득했다. 우선 6,000만원 이상 들여 구입한 재고를 정리해서라도 최소한의 돈을 건져야 했다. 이리저리 물색하다 발견한 곳이 인터넷 경매 사이트 옥션.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대박이었다. 중고처리업자에게 판매하면 5,000원 남짓할 완구가 옥션에서는 10배 이상의 가격에 팔려 나갔다. “차라리 경매를 통해 유아 용품을 팔아보자”고 결심한 것이 이 때였다.

처음엔 중고품을 그러다 차츰 신제품을 경매 사이트에 올렸다. 직원도 없이 혼자서 인터넷에 완구 사진을 올리고 제품을 포장해서 배송하는 업무까지를 도맡아 하기를 3년 가량. 한창 잘 나갈 때는 월 매출이 4,000만~5,000만원에 달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지독한 불경기라 요즘은 매출이 절반 정도로 줄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생겼다”고 했다.

그간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돈 보다도 아이들이었다. “활달하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던 아이들이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소극적으로 변하더군요.” 32평 짜리 아파트에 살다가 19평 짜리 연립주택으로 옮겼으니 아이들의 충격이 큰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이제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그는 당시의 명퇴자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명퇴와 함께 회사를 떠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조언을 한다. “남의 돈까지 털어서 사업을 시작하니 한번 무너지면 일어서기가 힘들더라구요. 얼마든지 소자본을 가지고 틈새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아이템이 의외로 많습니다. 크게 시작해야 대박이 난다는 생각을 버리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0-16 13:47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