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원 지나면 바로 부처세상

[주말이 즐겁다] 영월 법흥사
무릉도원 지나면 바로 부처세상

이즈음의 산하는 어디를 가나 단풍이 한창이다. 도시의 번잡함을 훌훌 털어내고 가을의 서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그리워지는 시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처마 끝 풍경이 흔들리는 가을 산사(山寺)만큼 계절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산문에 들면 굳이 종교를 따질 필요도 없다. 법당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뜰 앞에 서있는 천년 탑도 돌면서 소박한 소원도 빌어보자.


산태극 수태극 절경 이룬 요선암

영월 사자산(1,120m) 법흥사(法興寺) 들머리의 무릉리. 바로 이웃의 도원리와 더불어 서만이강의 ‘무릉도원’이라 알려진 곳이다. 고개를 들면 불법(佛法)을 적시고 흘러 내려온 법흥천이 서만이강에 합류하며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을 이룬 물굽이에 커다란 암봉 하나가 눈길을 끈다.

요선암(邀仙岩). 조선의 4대 명필 중 한 분으로 꼽히는 양사언이 군수 시절 자주 들렀다는 바위다. 그 아래 물가엔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선녀탕이 있으니 요선암은 ‘선녀를 맞이하는 바위’인 셈이다.

이런 곳에 어찌 정자가 없겠는가. 바위 꼭대기 주변 조망이 뛰어난 자리엔 요선정(邀仙亭)이 서있는데, 굽어 자란 노송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굽이도는 물줄기 풍광이 아주 일품이다. 그야말로 하늘나라 선녀가 내려와 노닐만한 정자인 것이다.

이 정자 자리는 신라 불교 전성기에 징효가 열반했을 때 1,000 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암자터. 정자 한쪽의 둥근 바위에 새겨진 돌부처는 이곳의 주인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마애석불로 꼽히지만, 결가부좌한 발을 비롯한 하체가 상체보다 너무 커서 조화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도 차가운 돌을 어루만지면 바위에서 빠져나온 돌부처가 강물과 더불어 겪어온 천년의 사연을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들려줄 것만 같다.

요선정을 내려와 법흥천을 거슬러 오른다. 산 모퉁이 하나만 돌면 법흥사인데 화전민들이 모여 살았다는 새터 마을을 지날 때쯤이면 자그마한 돌이 눈길을 끈다. 원주사자산 황장금표비(原州獅子山 黃腸禁標碑). 높이 110㎝ 폭 55㎝의 아담한 자연석에 새겨진 글씨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에 시달렸으나 아직도 글자만은 뚜렷이 알아 볼 수 있다. 이 황장금표비(黃腸禁標碑)는 1802년에 세워졌으니 어느덧 200년의 세월을 훌쩍 넘겼다.

조선시대엔 궁궐 등의 건축재로 공급된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을 보호하기 위해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송목금벌(松木禁伐)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고급 소나무는 아무나 마구 베어다 쓸 수 없었고 황장금표비를 세워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했다. 이곳을 비롯해 울진 소광리, 원주 치악산, 인제 한계리 등 지금 전국 곳곳에 남아있는 황장금표비가 그 증거가 된다.


부처 진신사리 모신 적멸보궁

황장금표비를 지나면 이내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과 더불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에 꼽히는 절집이다.

643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후 헌강왕 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을 열고 위세를 떨쳤건만 불에 타버린 다음 천년 가까이 작은 절로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중건하고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2년 산불로 다시 소실된 뒤 17년의 중건불사를 마쳤으나 몇 년 후 이번엔 산사태로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 1939년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최근에 다시 대대적인 불사를 했다.

극락전에서 적멸보궁 오르는 길은 단풍의 바다다. 소나무, 전나무 어우러진 숲길 을 지나 맑은 샘물로 갈증을 달랜 뒤 다시 투명한 가을 햇살 쏟아지는 오솔길을 걸으면 이내 우람한 병풍바위가 호위하고 있는 적멸보궁. 진신사리를 모신 곳답게 신비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법흥사 적멸보궁 안엔 불상이 없다. 대신 적멸보궁 뒤쪽 언덕에 자장율사가 기도한 토굴과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부도, 그리고 당나라에서 사리를 넣어 사자 등에 싣고 왔다는 석분(石墳)이 있다.

그러나 부도는 상징일 뿐이다. 자장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 중 몇 톨을 저 뒷산 어딘가에 묻어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적멸보궁 뒷산 전체가 바로 신앙의 대상이 된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등 온 산이 다 부처의 몸인 셈이다. 그렇다면 붉게 타오르는 이 단풍 또한 부처가 아니겠는가.

부처의 자애로운 손길인가. 이른 낙엽 하나 허공을 긋는데, 문득 향내 그윽한 적멸보궁에서 울려 퍼지는 낭랑한 독경소리…. 사바 세계에서 묻혀온 온갖 때가 모두 씻겨 나간 듯 정신이 맑아진다.


▲ 교통 영동고속도로 신림 나들목→88번 국가지원지방도(주천 방향)→22km→주천면 소재지(법흥사 방향)→5km→요선암→5km→황장금표비→5km→법흥사. 법흥사 종무소 전화 033-374-9177.


▲ 숙식 요선암 부근의 무릉리에 콘도식 민박집인 무릉가족(033-372-6658), 좋은생각(033-332-0019) 등이 있고, 법흥천 들머리에도 민박집이 많다. 또 산천어와 송어회를 맛볼 수 있는 무릉송어장(033-372-8388)을 비롯해 서만이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로 매운탕 끓여 내놓는 식당도 여럿 있다.

민병준 여행작가


입력시간 : 2003-10-16 17:26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