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한 고통의 기록

[시네마 타운] 토끼 울타리(Rabbit Proof Fence)
1900년대 영국 식민지 정부에 의한 고통의 기록

아주 오래 전에 호주 출신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이 호주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만든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이름도, 제목도 잘 떠오르지 않지만, 원주민들이 카메라의 대상(object)으로 보여지는 다큐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라 원주민이 카메라의 주인이 되는 입장에서 만든 신선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감독은 원주민들에게 카메라에 대해 설명해 주고 이렇게 찍으면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보여주면서 그들이 화면에 어떻게 비춰지면 좋은 지에 대해 많이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그 과정으로 알게 된, 그래서 다큐 화면에 계속해서 원주민이 등장할 때 나오는 화면의 구도는 참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름답게 화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들이 속해있는 땅이 넓고 크게 나오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흔히 인물을 담을 때 사용하는 렌즈가 아니라 볼록렌즈를 사용해서 사람들의 모습은 좀 왜곡이 되더라도 그들이 속해있는 대지가 화면에 더 깊고 더 광활하게 나오도록 촬영하기를 요구했다.


감동적으로 그린 호주역사

그 다큐멘타리가 내가 호주 원주민에 대해 좀더 인간적인 관심을 갖게 한 유일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은데, <토끼 울타리>는 호주 원주민들이 겪은 1900년대 초반의 고통스런 역사를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아마 대다수의 관객들은 1900년대에 영국 식민 정부가 호주 원주민 여성들과 백인 남성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동들(half-castes)을 엄마로부터 강제로 “훔쳐”와서 수용소 같은 열악한 환경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한 다음, 백인 가정의 가정부가 되는 교육(?)을 시켰던 끔찍한 역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호주는 백인중심사회이고 다양한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뿐이지 그런 사회가 형성되기 전에 원래 그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는지에 관한 내용은 서구 백인중심의 역사관에서 관심거리로 등장하지 않았다.

원래 살고 있던 대지와 삶의 방식과 게다가 자식까지도 혼혈이라는 이유로 빼앗겼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아픔을 지녔는지는 원주민이라는 변방의 위치, 게다가 여성(어머니와 딸들)에 대한 성차별적 관념이 더해져 그 사실이 지금과 아주 많이 떨어져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지워졌다.

당시 영국 식민지 정부는 혼혈아들이 도덕적으로 치욕적인 존재이고 자라서 사회에 위협을 줄 거라며 이들을 분리해내는 방안을 만들어 낸다.

겉으로는 혼혈아들을 야생적인 원주민의 세계에서 보호하고 교육시킨다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는 아주 질이 낮은 주거 환경에서 제대로 교육도 하지 않았고 특히 여아들은 자라서 백인 가정의 무급 가정부로 가게 만들었던 처참한 정책이었다.

비인간적이며, 인종차별적이고, 노동력 착취이며, 인권 유린이었던 이 정책은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1970년까지 계속되었고, 이 영화의 배경은 1930년대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14살의 몰리(에블린 샘피), 8살 동생 데이지(티아나 산스베리), 10살이었던 사춘 그레이시(로라 모나한)는 어느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무어강 근처에 위치한 수용소로 끌려간다. 하루 밤을 지내면서 강압적인 규율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도망치다 잡힌 소녀가 매를 맞고 작은 헛간에 갇혀 고통 받는 것을 본 몰리는 탈출을 결심한다.

영리한 몰리는 그 곳에 고용된 원岺?아저씨가 발자국을 따라 찾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비가 오는 날을 택하고, 집이 있는 지가롱이라는 곳까지 2,400㎞를 6주 동안 걷고 걸어서 엄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열망과 용기, 그리고 슬기로운 그들

<토끼울타리>는 <엄마 찾아 삼만리>류의 영화들처럼 가엽고 불쌍한 아이들이 훌쩍이는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열망과 용기, 온갖 험난한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이야기에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명료하게 더해진다. 소녀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관리와 경찰들과의 갈등 구조도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여기에다 사명감을 갖고 혼혈아 분리정책을 실시하는 영국 관리 A.O. 네빌(케네스 브라나), 그가 주장하는 3대에 걸쳐서 백인으로 변화하는 하프카스트들에 대한 논리, 네빌의 강의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백인 여성들, 백인가정의 가정부로 일하다 밤에는 백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는 비참한 삶을 사는 혼혈 여성 등에 대한 이야기가 더해진다.

제목 ‘토끼 울타리’는 당시 식민지 정부가 원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구분하면서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 사막지역을 가로 질러 나무기둥과 철망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세 아이들은 그 울타리를 따라가면 집이 나올 거라고 믿고 그 담장을 따라 엄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영화는 실화의 배경인 호주 서북부에서 촬영이 됐고, 세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연기 경험이 없는 소녀들이었다. 노이스 감독이 “짚 더미에서 세 개의 바늘을 찾는 것”이라고 표현한 캐스팅은 1,200명을 인터뷰하느라 한 달 넘는 시간을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선발된 소녀들은 몇 달에 걸쳐 연기 공부를 한 것 뿐 인데도 불구하고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글머리에서 언급한 원주민들이 선호하는 화면구도는 몰리, 그레이시, 데이지가 사막을 가로지를 때 종종 등장한다. 카메라는 그들과 떨어져 낮은 위치에서 주인공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땅이 화면 중하단부를 차지하면서 대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거대한 사막을 먼 거리에서 촬영한 장면들도 하늘과 대지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다.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가고 엄마가 아이를 빼앗기는 고통을 받는 모습은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와 감동이다. 그러나 <토끼울타리>는 그 배경에 인종에 대한 편견과 공포, 인종말살적인 생각들이 원주민 복지 정책이라는 허울을 쓰고 행해졌던 어두운 역사를 들춰내는 아주 의미 있는 작품이다.

시네마 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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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정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3-10-17 10:38


채윤정 영화평론가 blauth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