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다실재하지 않는 공간과 현실을 넘나드는 사랑

[시네마 타운]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그림속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다
실재하지 않는 공간과 현실을 넘나드는 사랑


1990년대 초반에 <결혼이야기>를 필두로 로맨틱코미디가 가장 흥행성이 높은, 주류 장르였던 때가 있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지겹게 다루고 있던 연애담과 로맨틱코미디 영화가 차별화할 수 있었던 점은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틀 속에서 성인 남녀의 성에 대한 묘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외도, 육아, 이혼 등의 문제들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주로 심각한 비극의 고리로서보다는 코미디의 요소로 등장했다.

90년대 이전의 멜로드라마들이 거의 비극적이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멜로의 요소가 코미디와 결합했다는 것은 <미워도 다시 한번>과 같은 미혼모의 비극, 호스티스 여성의 운명, <애마부인>류의 모순적인 성애 등이 다루고 있던 시대를 탈피, 극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고 또한 멜로 관객이 그만큼 젊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거침없는 여성캐릭터

그러나 90년대 말을 계기로 적어도 영화에서는 결혼이 전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로맨스와 성이 가능해지지만, 오히려 로맨틱코미디는 키스 이외의 육체적 관계는 그리지 않는 순정만화 같은 모습을 선호하게 된다.

그리고 주목할만한 점은 여성 캐릭터의 획기적인 변화이다. 종종 먼저 사귀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리드를 하거나, 예쁘게 보이려고 내숭을 떨기는커녕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이하 <봄곰>)의 여주인공도 그런 여성주인공들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는다.

정현채(배두나)는 외모와 연애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 미란(윤지혜)이 인정하듯 외모는 괜찮지만 아빠 로션을 바르고 출근하거나 아빠가 직접 나서서 화장을 해주기도 할 만큼 꾸미는데에 별로 관심이 없다. 스튜어디스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할인매장에서 근무하며 틈틈이 미란과 찜질방을 가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어느날 아빠 부탁으로 도서관에서 빌려온 화집에 쓰여있는 사랑 고백을 읽으면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한 다양한 작전(?)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현채는 데이트를 할 때 사투리가 섞인 어투로 큰소리를 내며 웃거나 영화관에서 콜라를 마지막까지 소리 내며 마시고, 주인공들이 뽀뽀한다며 박수를 치며 웃어댄다. 힘은 세지만 단순한 것 같고, 좀 엉뚱한데 밉지 않은 모습은 <굳세어라 금순아>(2002)와 그 캐릭터를 그대로 따온 텔레비전 드라마 <위풍당당 그녀>에서 배두나가 선보인 억척스럽지만 귀엽고, 촌스럽지만 매력적인 역할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제목이 특이한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하게 여겨졌던 부분은 화집에 등장하는 그림과 그 그림을 보며 그림과 같은 곳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는 모습을 현채가 상상하는 장면, 그리고 현채의 현실이라는 세가지 다른 이미지의 층위들이다.

고야, 르느와르, 프레드릭 스튜어트 처치, 윌리엄 멀레디와 같은 작가들의 대표적 그림과 제작진이 그럴듯하게 만들어낸 그림들은 현채가 꿈에 그리던 로맨스의 여주인공이 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첫번째 등장하는 그림인 ‘봄의 향연’ 아래 “겨울잠에서 깨어난 귀여운 곰같이”라는 귀절은 늘 곰같다는 말을 들어 온 현채에게 그 귀여운 여성이 바로 자신이라고 믿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현채는 그림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곰과 자신을 동일화해 바로 자신의 환상에서 곰 분장을 하고 재주 넘기 까지 한다.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그림들은 지극히 낭만적인 작품들로 더 이상 곰이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되어 현실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실재하지 않는 공간과 시간 속으로 그녀를 이끈다.


엉뚱하고 귀여운 사랑찾기

이런 서양화에 등장하는 품위 있는 여성의 이미지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쥐가 나오기도 하는 집과 지하철, 기차, 할인점으로 이동하는 현채의 현실을 감안할 때 이상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이미지이다.

현채는 매장에서 입어야 하는 유니폼과 집에서 편하게 입는 파자마가 아니라 우아하게 틀어올린 머리를 하고 대저택의 거대한 식탁에 앉아있거나 나무 그늘 밑에서 연인과 만남을 가지는 그림 속의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녀가 그림을 보며 꿈꾸는 이미지들은 현실적으로 최선에 가까운 동하의 사랑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채의 어리숙하고 곰같은 미련한 행동이 매력으로 돋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에 미란은 상대적으로 매력적이기보다는 뭔가 지나친 여성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채와 미란이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유형의 여성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현채와 소꿉친구이며 현채를 좋아하는 동하(김남진)에게 마음이 있는 미란은 셋이서 라면을 먹을 때도 후르륵 쩝쩝대는 현채와 대조적으로 키득거리게 만들만큼 요염하게(?) 면을 빨아들인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미란은 섹시함으로 인정을 받았겠지만 현채와 대조되는 그녀의 야한 모습조차도 코미디 색으로 덧칠된다.

어릴 적부터 지하철 기관사가 꿈이었던 순수하고 정 많은 동하는 현채의 종아리를 마사지해주다가 그 옆에서 현채의 발을 얼굴에 묻은 채 잠들고 라면이 먹고싶다는 현채의 말에 한 밤중에 라면, 생수, 버너를 들고 자전거로 달려와 집 앞에서 라면을 끓여주는 따뜻한 남성이다.

사실 동하가 현채에게 “잘 생기고, 똑똑하고, 매너 좋고 뭐 그런 엘리트틱한 사람이 좋지? 근데 그런 거 다 소용없다. 그것보단….항상 널 지켜주고 무슨 짓을 해도 네 편이 되고, 변하지 않고 널 사랑해 줄 사람이 있어야지”라고 얘기할 때 이 훤칠하고 잘생기고 게다가 마음씨까지 고운 동하가 이상적인 남성상임을 확인시켜준다.

현채가 화집에 담긴 사랑 고백의 주인공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동하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기 전까지 코믹한 에피소드들을 묶어주기 위한 구실일 뿐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항에 해파리를 키우고 꽃병에 양파를 키우는 이 엉뚱하지만 귀여운 아가씨는 오랜만에 만나는 매력 있는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시네마 단신
   



제3회 인디 다큐페스티벌 개최

올해로 3회를 맞는 인디다큐페스티벌이 10월25일부터 30일까지 6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올해 영화제에서 국내 신작으로 소개될 작품은 단편 5편, 장편 14편.

폐막작으로 선정된 김동원 감독의 <송환>을 비롯, 장애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거북이 시스터즈>(이영), 대한뉴스를 샘플링해 만든 <각하의 만수무강>(김경만), 30년간 서로 그리워하는 두 자매 할머니의 삶을 다룬 <봄이 오면>(정수연) 등 다양한 소재의 작품이 선보일 예정이다.

외국 작품으로는 미국 독립영화작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로버트 크레이머의 회고전이 눈길을 끈다. 베트남전의 진실을 다룬 <피플스 워>, 60년대 미국의 지하혁명조직을 그린 <아이스> 등 5편이 초청됐다. 문의 02-334-3166, www.sidof.org


뉴 시네마 네트워크 결성

박철수 감독을 비롯해 김유진, 이현승, 변영주,정지영, 권칠인 등 영화 감독 30명이 '새로운 영화 환경과 방식, 의식'을 기치로 '뉴 시네마 네트워크(NCNㆍNew Cinema Network)'를 결성했다. 10편의 영화가 10명의 감독에 의해 동시에 기획, 제작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연간 30편을 목표로 운용될 예정. 제작비는 투자를 받아 모은 자금으로 마련되며 편당 5억~7억원의 제작비가 지급된다.

채윤정 영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3-10-21 11:34


채윤정 영화평론가 blauth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