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살 녹고, 톡 쏘고… 진짜배기 맛일세

[맛이 있는 집] 흑산도 예리항 15번지 홍어
살살 녹고, 톡 쏘고… 진짜배기 맛일세

전라도에서는 집안에 경사로운 일이 있을 때 상에 꼭 홍어를 올린다고 한다. 홍어가 빠진 잔치는 잔치도 아니라는 것이 전라도 사람들의 상식. 필자의 고향에서는 홍어 대신 문어가 잔칫상의 가장 돋보이는 음식이다. 문어 없는 잔칫상은 볼품이 없고, 손님들은 주인의 성의가 부족하다고 여기기 십상이다.

어렸을 적부터 문어는 숱하게 먹어왔지만 필자에게 있어 홍어는 낯선 음식이다. 전라도 땅 여기저기를 여행하며 홍어를 맛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곤혹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귀하고 비싼 음식인 홍어를 남기기란 상을 차린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막상 먹고 나면 하루종일 입안에서 홍어 냄새가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10월초 흑산도와 홍도를 여행할 일이 생겼다. 전라도에서 그것도 흑산도까지 갔으니 당연히 홍어를 먹어야만 할 터였다. 흑산도를 잘 안다는 목포 사람한테 홍어집 한군데를 소개 받았다. 작지만 맛 하나만은 흑산도에서도 최고라는 설명이었다.

예리항의 15번지 홍어집. 가게도 자그마하고 무엇보다 상호가 재미있다. 주인인 박학준 사장의 도매인 번호에서 따온 것이다. 흑산도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홍어는 들어오는대로 어시장에서 경매가 시작되는데 거래인 마다 고유의 번호를 가지고 있다. 박사장의 도매인 번호가 바로 15번인 것.

그날 아침 시장에서 샀다는 싱싱한 것과 직접 삭힌 것을 반씩 썰어 한 접시를 만들어 내온다. 밝은 선홍색을 띄는 것은 신선한 회일 것이요, 가장자리가 연한 갈색을 띄는 쪽이 삭힌 홍어일 터이다. 그런데 어느 쪽인지, 어느 부위인지 짐작 가지 않는 살색 덩어리도 몇 점 놓여 있다. ‘애’라고 부르는 것인데 홍어 내장의 일부라고 한다.

애는 기름장에 살짝 찍어 먹는데 고소한 맛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 내린다. 애는 삭히면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신선한 홍어에서만 맛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잡은 날 아니면 녹아 버리기 때문에 뭍에서는 맛보기 힘든 것이 바로 애인 셈이다.

삭히지 않은 신선한 홍어회는 살이 보드라우면서도 씹을수록 차진 맛이 살아난다. 삭힌 홍어를 못 먹는 사람도 신선한 회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부위별로 각각 맛이 다른데 앞부분의 뾰족한 부분은 코, 양쪽 옆은 날개, 가운데는 살, 그리고 꼬리가 달려 있다. 오도독 씹는 맛이 각별한 뼈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고, 다른 부위에 비해 빨리 삭기 때문에 톡 쏘는 맛이 유난히 강한 코를 좋아하는 홍어 마니아들도 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보자면 ‘애’가 가장 맛있는 부위가 아닌가 싶다.

애와 신선한 회로 일단 홍어에 대한 그 동안의 선입견은 버렸으니 이제 진짜 홍어에 도전할 차례. 코를 쏘는 냄새와 혀를 자극하는 강한 맛이 제대로 삭힌 홍어임을 알 수 있다. 생각보다 먹을 만하다는 것이 첫 인상. 기름장을 찍어 잘 익은 김치로 돌돌 말아먹으니 냄새와 쏘는 맛이 반감되면서 원래의 감칠맛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홍어 마니아는 아니라도 맛은 조금 알 것 같다.

홍어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배가 살살 아플 때 홍어 몇 점을 약 대신 먹곤 한다. 소화가 잘되고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홍어는 홍탁이나 삼합으로 먹는 걸 제일로 친다. 홍탁이라 하면 홍어와 막걸리, 삼합은 홍어, 돼지고기, 김치를 말한다. 15번지 홍어집에서는 직접 만든 막걸리를 내놓는다. 맛이 진하면서도 개운한 것이 홍어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삼합은 겨울부터 시작할 거라고 한다. 애와 뼈 부분을 넣고 끓인 홍어매운탕도 특별한 맛이다.


▲ 메뉴 : 홍어회 40,000원(한접시) 061-275-5033, 017-617-5033


▲ 찾아가는 길 : 흑산도 선착장에서 배를 내려 바다를 왼편에 끼고 5분 정도 걷다보면 예리항에 도착한다. 예리항 입구에서 길이 두 개로 갈라지는 지점 오른쪽에 ‘15번지 홍어’라는 간판이 보인다. 식당과 홍어 도매를 겸하고 있어 이곳에서 삭힌 홍어를 마리째 구입할 수도 있다.

김숙현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3-10-22 13:25


김숙현 자유기고가 pararang@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