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주축 중도단에 '시민의 힘' 출범

시민 운동 '제3의 실험' 시작됐다
서민 주축 중도단에 '시민의 힘' 출범

또 하나의 시민 단체가 창립식을 가졌다. 양 극단에 모두 반기를 들고 중도를 표방했다.

“한쪽에서는 인공기를 태우고, 한쪽에서는 성조기를 태우고…. 좌우로 양극화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정되고 중심을 잡아갈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10여년이라는 얕은 역사를 가진 우리 시민 운동의 이념적 세포 분열 본격적으로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시민의 힘’.

이념의 세기가 종언을 고하고 인터넷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 대안적 사회 체제인 양 행세하는 이 시대, 공동체에의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변화한 시대를 호흡하고, 새로운 역학 구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시민 운동 진영이 펼치고 있는 변신의 모습을 중 하나다.

이념적 스펙트럼 상에서 ‘좌(左)’,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진보’. 흔히들 생각하는 시민 단체 혹은 시민 운동의 입지점이다. 현실적으로는 과거 군부 독재 시절에는 재야권에서 시민 운동 세력이 태동했기 때문이었고, 이념적으로는 변화와 개혁에 초점 맞춰진 운동의 본질이 보수보다는 진보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시민 운동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참여 연대의 영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를 지나 ‘참여 정부’로 접어 들면서 시민 운동에서 ‘반좌(反左)와’ ‘반(反)진보’의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정권과 지향점이 유사한 기존 시민 단체에 대항, 우와 보수를 지향하는 시민 운동이 급속히 세를 확장해 나갔다. 반핵반김 국민대회, 민주참여 네티즌연대, 북핵저지 시민연대, 자유시민연대….

자유총연맹이라는 과거 관변 단체를 제외하곤 변변한 시민 운동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던 보수 진영이 본격적으로 ‘궐기’를 시작한 것이다.

양측의 대립각은 갈수록 날카로워 졌다. 북핵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등 민감한 주요 현안마다 180도 다른 견해를 내놓으며 사회적 분열 양상으로까지 치달았다. 반발은 또 다른 반발을 낳았고, 확대 재생산됐다. 그들은 서로를 ‘극우’ 아니면, ‘극좌’로 몰아 세우기 일쑤다.


경실련 참연연대에서 국민의 힘까지

시민 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였다. 2년 1개월 뒤, 기존의 재야나 관변 단체 등과의 변별을 선언하며 출범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본래적 의미에 충실한 시민 단체의 효시라고 학계는 본다. 그러나 초기의 경실련은 정부와 재야 양쪽에서 협공을 받았다.

재야는 ‘개량주의’라고 압박했고, 정부는 ‘반정부 단체’라며 몰아 세웠다. 하지만 “투쟁을 위한 투쟁을 접고 모든 비판에 대안을 제시하자”는 경실련의 온건 노선은 갈수록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금융 실명제, 토지 공개념, 한국은행 독립 등 현실적인 제도 개선에 초점이 맞춰진 활동 덕택이다.

90년대 초반이 경실련의 시대였다면 90년대 후반 이후는 참여연대의 시대였다. 94년 출범한 참여연대는 경제 감시에 치중하던 경실련과 달리 권력 감시에 무게를 실었다. 경실련을 향해서는 “보수적이고 중산층 중심의 운동”이라며 선을 그었다.

특히 97년 외환 위기 사태와 함께 참여연대는 사회 운동의 핵심 단체로 부각됐다. 그들이 줄기차게 주장해 온 재벌 개혁, 부정 부패 해소 등이 사회 현안으로 급부상한 덕택이었다.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진보 진영의 틀 내에서 시민 운동은 분야별로 각개약진하며 ‘제5의 권력’으로 급부상한 때였다.

역할 과잉론, 조직 운영의 관료화 및 폐쇄성, 무책임성, 그리고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대립으로 대표되는 세력 내부의 갈등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최근 들어서는 진보 진영 시민 운동 세력의 정치 세력화가 두드러졌다. 2000년 4.13 총선 당시 ‘바꿔 열풍’을 불러 일으킨 총선연대의 낙선ㆍ낙천운동이 시작이었다.

올 들어 노사모의 핵심 세력들이 내년 총선에 대비해 결성한 네티즌 모임인 국민의 힘(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힘)을 출범시키며 시민 운동의 정치 세력화를 본격 선언했고, 과거 총선 연대의 바통을 이어 받은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 주체 형성을 촉구하는 시민 사회 1,000인 선언’은 아예 시민 정당의 창당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보수도 뭉쳤다

‘참여 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진보 진영 시민 단체의 위상이 강화하면서 보수 시민단체의 행보에도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보수 우익 세력의 핵심으로 등장한 곳은 ‘반핵반김 국민대회’. 3월1일 114개 보수 단체가 모여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를 개최한 것이 시초였다.

이후 ‘반핵반김 한ㆍ미동맹 강화 6.25 국민대회’ ‘건국 55주년 반핵반김 8.15 국민대회’ 등이 잇따라 개최됐다. 매 대회마다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릴 정도로 막강한 세를 과시했다.

‘반핵반김 국민대회’는 상설 기구가 아니라 주요 기념일에 보수 단체들이 결집해 공동의 주장을 펴는 연합체. 자유시민연대, 자유민주민족회의, 재향군인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북핵저지시민연대, 주권찾기시민모임 등 다양한 우파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서시주 대변인은 “최근 5년간 우리나라의 정체성과 자유민주체제의 근저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며 “지금껏 대남 적화통일을 포기하지 않는 냉전 체제를 옹호하는 시민운동 세력이야 말로 수구 보수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최근 인공기 소각에 대해 쏟아진 비판에 대해서도 이들은 확실한 소신을 밝힌다.

자유시민연대 김구부 사무총장은 “성조기와 인공기는 분명히 다르다. 현행법 상 인공기 훼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좌파 정부임이 확인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항의 표시이기도 했다”고 강경한 어투로 말했다.


시민의 힘, 시민운동 제3의 실험?

“몇몇 분이 저를 찾아와서 단체 설립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며 상임 대표를 맡아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 또 사적 이해 관계를 전면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등의 조건에 그들이 흔쾌히 동의하길래 대표직을 수락했죠.” 10월초 출범한 ‘시민의 힘’ 대표인 서경석 목사는 그저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대리인의 역할만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의 말마따나 ‘시민의 힘’은 서경석이라는 걸출한 운동가가 대표 직함을 꿰차고 있지만 실제 이 단체의 주인공들은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는 서민들이다. 전국철거민협의회, 전국신문공정판매 총연합회, 이륜차 운송협회, 서울가로매점상 연합회, 수평사회연대 등 11개 서민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그간 시민 운동이 지식인이나 명망가 등 엘리트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큰 차별성을 갖는 것이었다. 서경석 목사가 대표라는 점에서 참여연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경실련 운동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지만, 순수한 서민 운동이라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부분이었다.

서 목사는 진보 진영 시민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참여연대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한다.

“사실 참여연대는 중도 좌파의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꾸 좌측하고 손을 잡고 움직이니까 한쪽으로 쏠리는 두려움 때문에 거꾸로 우측 진영이 결집 필요성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분열이 심화하는 것이다.” 덧붙여 “시민 운동은 어떤 상황에서도 바른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때론 사회를 위해 옳은 것이라면 깜짝 놀랄 정도의 보수적 제안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시민의 힘’의 지향점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소외된 서민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부터 일부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된 대기업 노조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벌이겠다는 계획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서 목사는 “진짜 서민들이 시민 운동의 주체 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볼 작정”이라고 다짐했다.

‘시민의 힘’이 출범함으로써 달라져 가고 있는 시민 운동의 양상과 더불어 향후 시민 운동에서는 새로운 실험이 예견된다. 양 극단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양 극단간의 대립은 물론 진보, 보수 진영 각각의 내부에서도 갈등이 심화했다.

기존 참여연대와 경실련의 대립 외에도 민족자본주의를 주창하는 학자 중심의 ‘대안연대’가 등장해 참여연대를 향해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고, 보수 진영에서도 이제까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자유총연맹과 새롭게 등장한 반핵반김국민대회의 반목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아래서, 중간을 지향하는 단체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시민 운동 본연의 건전하고 생산적인 비판 기능을 회복하게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지난해 3월 출범해 중도 우파(혹은 중도 보수)로서 최근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시민회의(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조중근 사무처장은 “이념 스펙트럼 상 양 끝에 있는 단체들이 마치 다수의 시민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춰진다”며 “다양한 이념적 지향점을 가진 단체들이 양성돼서 제3세대 시민운동의 지평이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0-23 11:16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