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릿하고 새로운 놀이 인식, 신세대 네티즌들 뜨거운 관심

유쾌한 깜짝쇼 '플래시 몹' 광풍
짜릿하고 새로운 놀이 인식, 신세대 네티즌들 뜨거운 관심

“Again 2002~ 꿈★은 이루어진다?”

10월18일 서울 강남의 코엑스몰 광장. 오후 8시가 가까워지자 난데없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까지 두른 정체불명의 축구 선수들이 풍선을 들고 등장했다.

이들의 등장과 함께 쏟아지는 우렁찬 함성. 축구공 대신 풍선을 터트리며 축구 시합을 하는 선수들을 둘러싸고 코엑스 광장을 꽉 메운 관중들 사이에서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하는 매우 익숙한 응원가가 울려 퍼진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2002 월드컵’의 추억이 시내 한복판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3~4분이나 흘렀을까. 분위기가 고조되자 붉은 악마 복장을 한 관중들이 일제히 불꽃 막대에 점화를 해 화려한 불꽃 놀이로 저녁 하늘을 수놓는가 하면, 파도타기로 단합된 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다.

“도대체 뭐야?” “무슨 일 있나요” 하며 행인들이 이 희한한(?) 퍼포먼스를 구경하기 위해 기웃거리는 찰나, 호루라기가 울리고 선수들이 퇴장하더니 코엑스 광장을 빼곡이 채웠던 붉은 악마들도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채 10분을 넘기지 않은, 기발한 퍼포먼스였다.

미국과 유럽 등지를 휩쓸고 있는 ‘플래시몹’(flashmob)의 광풍이 국내에도 상륙했다. ‘플래시몹’은 플래시크라우드(flashcrowd -사용자가 갑자기 증가하는 현상)와 스마트몹(smart mob-뜻을 같이하는 군중)의 합성어. 2002년 10월 출간된 하워드 라인골드의 저서 ‘참여군중’(smart mob)에서 유래됐다.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인터넷과 이메일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일시에 한데 모여 똑같은 행동을 하고 사라져 버리는 일종의 ‘깜짝쇼’다.

서울 코엑스 행사는 지난 8월31일 서울 강남역에서 있었던 ‘행인들에게 인사하기’, 9월20일 명동에서 펼쳐졌던 ‘외계인 놀이’에 이은 세 번째 플래시몹. 전혀 새롭고 신기한 놀이에 대한 신세대의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듯 무려 3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려 들어 진풍경을 연출했다.


뉴욕서 시작, 전세계 대도시로 급속 전파

플래시몹 퍼포먼스는 지난 6월 미국 뉴욕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심야에 한 호텔 로비에 모여 15초 동안 요란하게 박수를 친 뒤 사라졌다. 이후 약속이라도 한 듯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등 세계 각국의 대도시로 이 같은 현상은 전파됐다.

8월말 국내 첫 플래시몹이 벌어진 후, 이 놀라운 ‘놀이’소식은 네티즌들에게 빠른 속도로 전해지면서 전염병처럼 급속히 번져가고 있다. 최근 포털사이트 다음(www.daum.net)에만 22개의 플래시몹 카페가 생겨났다. 한 플래시몹 참여자는 “떨리는 마음에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지만, 막상 해보니 재미있었다”며 “새로운 아이디어의 몹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관련 카페들은 소개 말부터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현실세계로 나오는 공동체의 詩적 놀이” “평범한 일상에서의 짜릿한 탈출 계획” “나의 자유와 만인의 기억을 위한 플래시몹” 등등. 이 가운데 7월31일에 개설된 ‘플래쉬몹’의 회원수는 채 석 달이 지나기도 전에 8,500여 명을 넘어설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카페의 회원인 ID ‘빌리코건’은 3차 ‘플래시몹’을 이틀 앞둔 16일 카페 게시판에 설레는 마음을 담은 글을 올렸다. “넘넘 신난다. 처음인데 벌써부터 몸이 간지러워지고 있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히히~”

기발한 아이디어도 빗발친다.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처럼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리는 놀이를 제안하는 경우는 애교 있는 쪽에 속한다.

‘돈키호테’처럼 칼을 뽑아 들고 “덤벼라”하고 소리친다거나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을 먹어치우는 괴물 ‘좀비’가 된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길 한복판을 횡단하자는 엽기적인 아이디어도 볼 수 있다.


타인에게 피해 최소화 등 규칙도

주변의 사람들은 ‘뭐 하는 짓인가’하며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일쑤지만, 플래시몹 마니아들에겐 이유를 묻는 것은 불문율을 깨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물어도 “그냥”이라는 알쏭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네티즌 ‘多鼓矮밈끝?는 “목적이 없는 것이 목적이 되는 놀이가 플래시몹”이라며 “모두가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문화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놀이를 즐기는데 굳이 이유를 찾고 목적을 들이대는 것 자체가 필요 없는 일종의 ‘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나름의 규칙은 있다. ▦해산할 때 무리 지어 흩어지지 않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다른 참여자의 신상정보에 대해 묻지 않는다 등이다.

갑자기 불어닥친 이 새로운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시국도 어려운데 무슨 할 짓이 없어 저러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반면 “스트레스를 푸는 재미있는 놀이”라는 의견도 많다. 전문가들은 플래시몹의 유행을 ‘익명성의 그늘 아래 안주해온 네티즌들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원하는 이중적인 욕구를 드러낸 것’으로 본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상당히 흥미롭고 관심을 유도하는 신기한 현상”이라며 “집단에 깊숙이 얽매이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짧은 순간 공동체의 일원이기를 갈망하는 개인들이 빚어내는 역설적 유희”라고 분석한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동식씨는 “의미 과잉의 시대를 통쾌하게 뛰어넘는 휘발성 무의미의 놀이”라며 “무의미한 경계를 뛰어넘을 때 느끼는 해방감이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에 불어닥친 플래시몹 열풍이 성공적으로 국내에 안착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일종의 유행이다. 특정한 목적이 없는 행위가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느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또 미국 등지의 일부 플래시몹이 최근 특정 상품의 광고에 앞장서는 등 상업화에 물들여졌듯이 조만간 상업적인 목적이나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우려했다.

하지만 플래시몹 카페 운영진들은 10월25일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글로벌 플래시몹’에 맞춰 대구 인천 대전 등 지역 모임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거사’(擧事)를 예고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3-10-23 11:48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