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 개그펀치] 부의가 'V'로 둔갑


얼마 전 작가실에서 원고를 쓰고 있는데 한참 어린 후배 하나가 신문을 읽다가 소리를 질렀다. “형, 대통령이 교통사고래.” 웬 뜬금없는 말인가싶어서 신문을 낚아채 읽어보았다. 신문에 ‘대관령 교통사고’ 라는 활자가 박혀있었는데 후배 녀석이 대관령을 대통령으로 잘못읽고 난리를 친 거였다.

“야, 이게 대통령이냐? 대관령이잖아.”

“그런가? 대자 하고 령자는 맞았는데, 이게 관자구나.”

“소위 작가라는 애가 한자도 못 읽냐? 어디 가서 작가라고 말도 하지 마라.” “난 한자 세대가 아니잖아. ”

요즘 젊은 애들이 한자를 제대로 못 읽는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맞는가 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아들은 작년부터 한자를 공부하고 있다. 처음에 아이에게 한자 학습지를 시킨다고 했을 때 썩 내키는 기분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이것저것 하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거기다 한자까지 추가를 시킨다니 기가 막혔다. 아직은 어리다싶은데 벌써 본격적인 한자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빠른 것도 아니야. 유치원 때부터 시작하는 애들도 많은데 뭐. 한자를 알아야 국어가 쉬워지는 거야. 내용 파악이 빠르잖아.” 초등학생인 아이를 마치 중학생 공부시키듯 하는 아내의 일장연설에 별다른 문제제기도 못하고 말았다. 아이는 한자를 마치 놀이처럼 배워나갔고 언제부터인가는 신문의 헤드라인에 적혀있는 한자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반대했지만 아이가 태연한 얼굴로 한자를 읽는 것을 보자 나도 어쩔 수 없는 팔불출 아버지인지 마냥 흐뭇해지는 것이었다. 거기다 대관령을 대통령으로 잘못 읽고 난리를 친 후배를 보고 나니까 어느 정도 안도의 한숨까지 나왔다.

대학생들 중에는 신문에 실린 한자를 제대로 못읽고 부모님의 이름을 한자로 쓸 줄 아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고 한다. 사실 내 또래의 세대만 하더라도 한자는 익숙하다. 어려서부터 놀이처럼 부모님의 이름을 한자로 그리는(?) 연습을 했다.

우리나라는 어차피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으므로 아름다운 한글만 사용하자는 주장 아래 한자를 무시하기에는 그 영향력이 거대하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자를 전혀 쓰지않고 생활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서 한자를 완전히 배제한다면 서로의 의사소통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 때로는 애매한 표현이나 잘 모르는 단어를 만났을 때 한자를 보고 단번에 명쾌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전에 아는 동생이 부친상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문상을 가야 했는데 날짜가 촉박한데다가 내가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궁리를 하다가 대학에 갓 입학한 조카 녀석이 생각났다. 부친상을 당한 녀석도 조카 녀석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딱이다 싶어 전화를 걸어 부탁을 했다.

“삼촌이 못 가니까 대신 갔다가 와. 가서 깍듯이 인사하고. 그리고 봉투를 보내야 하거든. 돈 넣고 봉투 뒤에다가는 삼촌 이름 쓰고, 앞에는 부의라고 써서 내라.”

“알았어요.”

“앞에다 꼭 부의(賻儀)라고 써. 못하겠으면 아버지한테 써달라고 해.”

“에이 삼촌은 날 어떻게 보고. 걱정마세요. ”

저녁때 무사히 임무 완수를 하고 왔다는 조카 녀석의 보고를 받고 나서 내심 안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후 부친상을 당했던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다. 못가서 미안하다는 내 인사에 녀석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빠서 못 온거야 내가 형 사정 아니까 괜찮은데. 근데 형, 봉투에 그게 뭐야?” “왜? 뭐 잘못됐니?” “참 내. 아무리 개그작가라지만 너무 했어. 봉투에 ‘V’ 자를 적어서 보내는 게 어디 있어? 로봇 태권V 도 아니고….”

부의를 V로 잘못 알고 떡하니 적어간 조카 녀석 때문에 정말이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입력시간 : 2003-10-28 15:0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