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신무협에 투영된 한국사회


황당무계한 기연(奇緣)의 연속, 주인공의 어처구니없는 초능력, 지루할 만하면 등장하는 싸구려 외설, 기본적인 문법조차 지키지 않은 엉터리 문장, 한 문장으로 한 단락을 구성해 놓은 시원한(?) 본문편집, 두껍지만 잘 부스러지는 질 나쁜 종이, 그리고 가끔씩 눈에 띄는 라면 국물들… 어린 시절 대여점에서 빌려보았던 무협소설에 대한 인상들이다.

무협소설은 남성들의 판타지를 대변하는 싸구려 대중문학이었고, 음습한 만화대여점을 떠도는 대중문화의 유령쯤으로만 여겨져 왔다.

한국 무협소설의 흐름은 크게 4 시기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무협소설 열풍이 몰아쳤던 1960년대이다. 한국 무협소설의 효시인 김광주의 <정협지>(1961)가 웨이츠원(尉遲文)의 <검해고홍>을 번안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에는 대만 무협소설의 번안 및 번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두 번째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의 시기로서, 한국 작가에 의해서 씌어진 이른바 ‘창작무협’이 주종을 이루었다. 하지만 상투적인 인물과 황당한 스토리가 남발되면서 무협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를 잡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진융(金庸)의 무협소설이 붐을 일으켰던 1980년대 초반 이후이다.

<영웅문> <소오강호> <의천도룡기> <녹정기> 등으로 이어진 진융 열풍은, 1990년대의 무라카미 하루키 열풍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1990년대 중반 이후에 펼쳐진 ‘신무협’의 시기이다. 신무협은 좌백, 풍종호, 진산 등의 젊은 무협작가들이 제시한 새로운 스타일의 창작무협소설을 말한다.

많은 무협소설이 나타나고 읽히고 잊혀지고 했지만, 무협소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은 강호의 진정한 고수만큼이나 드물다. 본격적인 무협소설 비평의 효시는 탁월한 문학비평가이자 불문학자였던 고(故) 김현의 <무협소설은 왜 읽히는가: 허무주의의 부정적 표출>(‘세대’ 1969년 10월)이다.

이 글은 1960년대의 무협 열풍을 그 당시 중산계층의 허무주의(패배의식)와 연관을 지어서 설명하고 있다. 4ㆍ19가 제시했던 역사적 전망은 희미해져 가고 지배계층에 대한 복종과 공포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소시민들은 무협소설에서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의 통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김현의 탁월한 분석 이후로는 무협소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한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다.

최근에 무협소설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진지하게 탐색한 흥미로운 책이 발간되었다. 서울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재직중인 전형준의 <무협소설의 문화적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신무협의 문화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대단히 인상적이다. 저자에 의하면 신무협은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기존의 무협소설의 상투적인 서사규칙들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무림 사회의 위계화한 질서가 의심의 대상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일반적으로 무협소설은 청년영웅이 자신의 무공을 연마하고 사악한 마두(魔頭)와 맞서 싸워 세상의 정의를 세우고 대협(大俠)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신무협의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좌백의 <대도오>(1995)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엽검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낭인 무사일 뿐 결코 무림의 대협이 되지 않는다.

그는 무림의 기성 질서에 내포된 허위의식과 속물근성을 비웃으며, 낭인 무사라는 주변부적인 삶이 갖는 독자적인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하급 무사에게도 저마다의 인생이 있다”는 그의 말에는 가슴을 때리는 절절함이 배어있다. 무협소설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영웅의 삶을 살아가지만, 신무협의 주인공들에게는 미리 주어져 있는 생의 의미라는 것이 없다.

그들에게 생의 의미는 불확정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며 모색의 대상이다. 또한 종래의 무협소설이 중산층을 지향했다면, 신무협은 주변부의 소수자에 주목한다. 신무협의 이러한 성격은 1990년대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사고가 반영된 양상이며, 동시에 중간계층이 붕괴되고 있는 한국사회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에서 기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생겨나고 있는가 라는 ‘현재적 생성’의 문제이다. 무협소설의 문화적 기원은 중국이다.

하지만 신무협은 한국적인 근거 위에서 생성되고 있는 동양적 판타지이다. 싸구려 대중문화이기를 거부하고 시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표현하고 있는 신무협, 그 문화적 의미를 읽어낸 저자의 통찰력이 매우 인상적이다. 가을에 좋은 책을 읽었고, 문화를 바라보는 눈을 얻는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 2003-10-28 15:06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