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예법과 차도정신 복원에 평생 바친 다애인

"우리나라 전통 다도엔 참인간의정신이 스며있죠"
차 예법과 차도정신 복원에 평생 바친 다애인


[인터뷰]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

녹차 한 잔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쓰고 떫은 녹차 한 잔에 인간의 오미(五味)가 담겨 있다”고 옛 선사들은 말했다. 오미란 것은 인간 생활의 오고락(五苦樂)과 일치한다. 눈(眼:안)으로 보고 분별을 짓고, 귀(耳:이)로 듣고 기분에 좌우되며, 코(鼻:비)로 냄새를 맡고, 혀(舌:설)로 맛을 보며, 촉각(身:신)으로 분별하는 등 감각과 인간 심성의 근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차 한잔의 여유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차(茶)는 오감(五感)으로 마신다. 찻물 끓는 소리를 귀로 듣는다. 차 향기를 코로 맡는다. 다구(茶具)와 차를 눈으로 직시한 한 채 차의 맛을 음미한다. 손으로는 찻잔의 감촉을 즐긴다. 차 한잔으로 가능한 자기 침전은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고 심성체계를 발전시킨다. ‘다선일미(茶禪一味: 다도와 선은 한 맛이다)‘의 정신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보유자인 김의정(62) 명원(茗園)문화재단 이사장. 그는 고 명원 김미희 여사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 궁중 차례에서의 차 예법과 차도 정신의 복원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 온 2세대 다애인(茶愛人)이다.

명원 김미희 여사는 1970년초부터 우리나라 차 역사의 흔적을 고증ㆍ연구해 이 시대 실생활에 맞는 생활다도를 정립시킨 ‘한국다도의 어머니’다. 성곡 김성곤 전 쌍용그룹 회장의 부인으로 한국복지부녀회 초대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차인회를 창설한 김 여사는 김 이사장의 친 어머니이기도 하다.


"궁중다례는 고려시대 의식문화의 꽃"

모친의 영향을 받아 15세 때부터 다례 연구에 심취해온 김 이사장은 10월 23일 명원 문화재단 창립 8주년을 맞아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고려시대의 궁중다례 의식을 재현했다.

궁중에서 공주를 시집 보내며 거행하는 공주하가의(公主下嫁儀) 중 진다례(眞茶禮) 의식인 이 행사는 혼례식때 차를 사용하는 고려시대 궁중다례의 전형을 보여줬다. 고려사 문헌(고려사 권67, 례9, 가례편)을 수년간 집중 고증해 재현한 이 의식은 다도가 왕성했던 고려 왕실의 대표적 가례법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 국내 뿐 아니라 다도가 활성화한 일본과 중국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었다.

김 이사장은 “궁중다례는 복식, 음식, 기물, 꽃, 음악, 무용 등 당대 문화의 정수가 어우러진 고려시대 의식 문화의 꽃”이라며 “고려때는 일반 백성들에게 보편화하지는 못했지만 왕실, 사대부 집안, 귀족사회, 학자, 불교 승녀들을 중심으로 의식다도로 발전하면서, 그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는 생활의 일부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쇠퇴함과 동시에 다례 행사가 오직 조상을 받드는 사당다례로 국한되면서 일반 생활다례는 자취를 감추고 몇몇 일부 학자나 선사들의 애음(愛飮)으로만 근간을 이어진 것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이후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거꾸로 일본으로부터 다도문화가 전수되면서 다도라면 모두가 일본의 잔재로만 이해되는 상황으로까지 몰린다. 결국 한국적인 다도문화는 실종된 채 차를 마시는 다구 조차도 일본의 것을 흉내낸 것 밖에 찾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저의 어머니인 명원 선생께서는 1969년부터 한국적인 다도 문화를 찾기 위한 첫 걸음으로 다구 고안과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김 이사장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명원 선생은 목기, 도자기, 무쇠 등 각 분야별로 한국적인 다구를 만들어내기 위해 성균관 대학 등 우리나라 역사 연구 기관의 도움을 얻어 다구 제작에 10여년을 투자했다. 주문한 물건이 단 한 번으로 완성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쓰면서 불편해 보완한 것은 그만 두고 라도 평균 다섯 번 정도를 반복, 보완해 비로소 완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다구들이 본격적으로 ╂滂풉?시작한 것은 1976년부터 였다. 이에 따라 서울 인사동을 중심으로 한국적인 모습을 한 새로운 다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역사 속 차문화 연구에 심혈"

“사실 다구 제작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행다례의 예법이었습니다. 차를 어떻게 끓이고, 탕물을 왜 씻어내며, 차를 마시는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같은 세세한 예법자체에 대한 발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김 이사장은 어릴적 어머니가 다례법을 연구하며 고민하던 모습을 회상했다.

김 이사장은 “옛날에는 다도가 서민들 속에 파고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뚜렷한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이를 정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고 말했다.

명원선생은 ‘동다송’을 비롯해 ‘다신전’, ‘다경’, ‘팔만대장경’ 등 고 문헌 등을 통해 우리역사 속의 차 문화에 대한 발자취를 집중 연구, 198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마침내 ‘명원 다례법’을 발표했다. 외국 사신을 맞을 때 하는 ‘접빈다래’와 명절의 ‘사당다례(祠堂茶禮)’, 연조정사의 ‘궁중다례’ 등을 포함, 오늘날 생활다례나 명절날 어른에게 따르는 다법은 바로 명원차 다례 덕택에 가능했다.

김 이사장은 “기다리는 인내심과 청결함, 남을 헤아릴 줄 아는 애타심을 배양하는 다도 정신은 요즘과 같이 가정 교육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한 시점에 배워야 할 중요한 자기 학습법”이라며 “생활 다도는 자녀들에게 가정 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또 눈 코 뜰새 없이 바삐 살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차나무’로 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역설했다.

차나무는 겨울에도 그 푸르른 빛을 잃지 않는 상록수다. 그 모습이 평범해 눈에 잘 띠지 않지만, 화려한 꽃이 피는 봄,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 아름다운 낙엽이 지는 가을 등 시절에 구애받지 않고 일관되게 자신의 모습을 지켜나간다. 또 차나무는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고 토질과 기후, 지형을 따져서 뿌리를 뻗는다.

그만큼 자기를 되돌아보며 스스로의 위치를 살핀다는 의미다. 차나무는 다른 나무처럼 옮겨 심기가 쉽지 않다. 자기의 터와 자기의 뿌리를 소중히 여기며 지조가 굳기 때문이다.


다도정신은 참된 생활의 길잡이

김 이사장은 “차나무는 깨끗이 이슬을 받고 살기 때문에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매사에 인내심이 강하고 또 지조가 곧고 번창할 수 있는 습성을 기를 수 있을 것”이라며 “앉고 서고 누울 자리를 깨끗이 고를 줄 아는 분별심도 배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도정신에 입각한 차 생활을 통해 참된 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의 진실됨을 스스로 깨치게 되고, 그 참됨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의 체험에서 얻어진다는 오묘한 경지를 체득하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차 생활의 멋은 정신의 원기를 회복시켜 줘, 생활다도는 결국 올바른 생활습관으로 이어진다고 김 이사장은 강조한다.

다도는 참된 각성을 목표로 한다. 차생활을 통해 평상생활의 도라고 하는 일상적인 생활을 지각하고 터득하며 자손들에게 범절과 더불어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 시킨다. “녹차 한 잔을 놓고 주고 받는 말이야 말로 거짓이 있을 수 없고, 사람다운 말이며 현대문명병에 오염된 정신적인 해독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그의 결론이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 2003-10-29 18:15


장학만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