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학에게 듣는다] 김숙희 영양학 박사



"천민자본주의 속, 가정살리기 "

‘이화여대 재직 30년, 사회 활동 30년, 세계 영양학회 30년.’ 스스로가 그려 보이는 인생 축약도다. 단순 명료하다. 또박또박 정제된 말투를 닮았는가, 군더더기라곤 찾을 수 없다.

“그게 내 삶의 줄거리”라고 말하는 선생의 어조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충만하다. 사회 활동이란 대한 YWCA 연합회에 몸 담았던 기간이다. 가정학회장(1980)과 교육부장관 재직 기간(1993)을 포함한 시간이다. 세계 영양 학회에서는 정확히 32년째 일해 오고 있다.

지난해 35년 9개월 동안 몸 담아 온 이화여대에서 퇴임한 선생에게 휴식이란 강 건너 일이다. 새롭게 한 가지가 추가됐다. ‘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시민의 모임’(약칭 ‘가건모’)의 회장이다. 본인의 분류법을 따르면 사회 활동에 속할 것이다.

10월 9일, 이화여고 류관순 기념관에서 창립 총회 준비 위원장으로 희망의 로켓을 높이 쏘아 올린 김숙희(66) 선생에게는 정년이란 말이 무색하다. 이 시대 들어 심각히 위협 받고 있는 사회 모(母)집단인 가정의 안위를 두고 학문적으로 탐구하자는 모임이다.

“이혼률 세계 2위라는 기록이 말해주듯, 지금 한국 사회는 도처에서 가족 해체의 움직임이 불거지고 있어요. 난잡해진 성문화도 결국은 가정의 위기에서 비롯됐고….” 설상가상으로 카드빚 문제까지 중첩돼 400만여명이 고통 받는 21세기 한국. 그로부터 도피하기위해 동반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도 서슴지 않기에 이르게 된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일까.

선생은 “전공이 가정학이라는 데 대해 가책을 많이 느꼈고, 뜻을 같이 하는 학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21세기판 ‘가정 신문화’ 운동이 싹튼 것이다. 정모근 호서대 총장의 격려사, 길희성 서강대 교수의 주제 강연 ‘한국 가족 윤리, 변해야 산다’ 등이 가정학 동창 4만과 재학생 8만여명의 염원을 담아 올렸다.

1년 동안 1주일에 한 번 꼴로, 주로 연세대 알렌관에서 전국의 관심 있는 교수들이 모여 벌였던 프리 토킹이 드디어 결실을 본 것이다. 줄잡아 수백명을 헤아리는 참여 교수들은 모두 대학 강의 경력 20~30년의 베테랑이다.

“지금껏 가정학이 식생활, 의생활, 육아, 가정 경제 관리 등으로 나뉘어 좁은 틀 안에서만 있었다는 자기 반성이죠.” 지금 곳곳에서 불거지는 가정 해체의 움직임에 대해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 했다는 자책의 결과이기도 했다. 가정학 관련 학문 전공자들에게 이 메일을 띄워 의사를 타진했다.

서울대 가정대가 사무실 설치에 동의해, 내년 방배동에 새 집을 갖게 될 때까지는 홈페이지(www.healthyfamily.or.kr) 운영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존존하게, 튕겨주고, 제의해 나갈 거예요.” 잔잔하게, 정책을 감시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말. 괜히 목소리만 높이 내는 단체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를 선생은 특유의 어투로 다짐했다. NGO 단체로서의 한계를 담담히 인정한 연후의 자기 다짐이 도사리고 있다.

“행사보다는 가치관을 수립해 나가는 작업”이라고도 말했다. 결코 화려한 일이 아님을 잘 안다. 우보(牛步)의 길이다. 가까이는 10월 21일, 서울 녹번동의 한 교회에서 여성들의 참여를 영성 운동의 견지에서 촉구했다.


총체성이 홀대받는 시대 모순

전통적 가치를 숫제 대놓고 비웃는 21세기,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선생은 그 ‘신문화 운동’을 네 가지 차원으로 나눈다. 먼저 경제는 아버지, 가사 노동은 어머니의 전담이라는 고정 관념을 깨야 한다.

조기 명퇴가 일상화된 요즘의 경제 주체는 어머니에게 이양된 결과, 아버지는 열등감을, 어머니는 불편을 감내해야 하며 결국은 불화와 싸움만 는다는 것이다. “이제 가사 노동 체계를 슬기롭게 재편할 때예요. 나눠서 일하고 나면 모두 편해지죠.”

다음, 전국 규모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중앙에서 교육을 담당한다. “가건모가 상담과 카운셀링을 동시에 하는 거죠.” 돌잔치부터 모든 통과의례가 호텔 부페서 치러지는 현대는 어려서부터 경제 관념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번째는 교수들이 설문지 조사 등의 방식으로 학회 차원에서만 논의돼 오던 문제를 일반 언어로 치환시켜 내는 단계다. 넷째는 방학 기간을 이용한 작업으로, 종이 인터넷 강연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일반을 상대로 펼치는 강연이다.

이것은 결국 시대 읽기의 문제다. “천민자본주의로 치닫는 우리 시대에 ‘돈의 정신’을 찾아 줘야 할 때”라는 선생은 다짐한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 나가야 할 지는 계속 논의해 가야 할 바”라는 말은 실천론인 셈이다. 예를 들자면 출산률 저하 문제도 그 중 하나다.

“현재 부부 한 쌍 당 1.17에 머문 출산률을 현상 유지선인 2.2로는 끌어 올려야 해요. 결국 정책의 문제죠. 임신한 여자에 대한 천대 풍조를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특화된 전문성(specialty)만 남고 총체성(wholeness)은 죽은 우리 시대의 모순이 위기의 가족에서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선생은 NGO로서의 현실적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다. 가건모가 사회의 모세 혈관으로서 신선한 혈액을 공급한다는 소임을 벗어 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은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쥐 실험부터 훈련 받던 시절”을 돌이키는 선생은 어느덧 초심으로 돌아가 있었다. 엄정한 자연과학의 단련, 낙후된 현실과의 갈등을 거쳐낸 시간들이었다.


인간의 달 정복에도 한 몫

이화여대 가정대 출신으로 택사스 여대 영양학과에 들어가, 3년만에 석ㆍ박사를 따냈다. 1963~65년 미국의 NASA 프로젝트 팀으로 초빙된 것은 당연했다. 암스트롱이 달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움직이지 않고 얼마 동안 버텨낼 수 있는지 등을 연구한 선생의 덕도 한몫한다.

박사 학위 테마였던 ‘코발트 60을 조사한 쥐의 골밀도 변화 측정‘이라는 첨단 연구는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당시 미국 언론은 ‘한국서 온 작은 소녀(Little Girl From Korea)가 일을 냈다’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삼고초려를 마다 않는 모교의 청을 더 이상 마다할 수 없었다. 김활란씨 이후 7번째 박사 교수가 그래서 탄생한 것이다.

28세때 돌아 와, 조교수부터 시작한 선생은 시장에 나가 당시 유통중이던 분유 11가지를 분석했다. 때마침 박정희 정권이 국내 분유 회사는 중단시키고, 호주의 제품을 수입할 것을 검토중이었다. “실험 결과, 서울 분유가 외국산보다 우수했지요. 당시 김옥길 이대 총장이 청와대에 그 사실을 전했고, 그 결과 서울우유는 살 수 있었죠.”선생의 연구는 그렇게 국내의 현실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진행됐다.

1999년 만든 한국식품영양재단은 고학력 실업자로 전락한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선생 아래서 석박사 학위를 따 놓고도 취직 못 한 제자들이 안타까워 선생이 나서서, 정부와 제약회사 등지로부터 연구비를 따 내는 것이다. 위탁 급식, 잉여 우유와 쌀, 섬유질과 올리고당 공급 등 우리 사회가 풍요속에서 방치해 버린 문제점을 짚어 가고 있다.

“칸쿤에서의 비극은 공산품을 팔아 올린 수익은 농민에게 완전히 차단돼 버린, 분배의 문제에서 비롯한 거죠.” 국민영양상태 등 관련 조사를 국내 유일하게 4계절 내내 펼치는 기관의 장으로서 선생은 시대의 비극을 직시하고 있었다.


억압적 교육현실에 안타까움

집 한켠에 마련된 작은 온실에서는 분재가 그윽한 향기를 발하고, 소금에 잘 절여진 참조기 두름은 대나무 소쿠리에 빛깔도 좋게 꾸덕꾸덕 말리워 지고 있다. 정갈한 실내 풍경과 함께 서울서는 좀체 누려보기 힘든 안정감을 준다. 막연한 느낌이 아니었다.

10월 21일, 모시고 사는 어머니 홍승숙(93) 여사의 생신이었다. 손자까지 모이고 나니 35명. 절간 같던 집이 모처럼 북적댔다. 막내인 동양학자 도올 김용옥씨와 부인 최영애(연세대 중문학과 교수)씨만 바쁜 일로 못 왔다. 11살 아래의, 그래서 어릴 적부터 돌봐 준, 명민했던 동생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다.

“기질이 센 건 아니었지만, 내 등에 업혀 있다가도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죠. 어릴 적, 기지 않고 앉아 다녔던 것도 독특한 기억이예요.” 강한 자기 주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박람한 지식으로 한국 지성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도올의 전사(前史) 답다.

육순을 넘도록, 선생의 영혼은 주변의 사물에 민감하게 감응한다. 9월 27일 뉴욕서 열린 한 강연회 참석차 비행기 여행 중 읽은 한 책은 그를 몇 번이고 울렸다. ‘Beautiful Mind’란 두툼한 하드 커버 책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아이의 개성을) 눌러서 똑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야 속이 시원한데, 그 책에는 사람을 어떻게 형성해 내는가 하는 지가 감동 깊게 그려져 있었어요. 너는 참 중요하고, 네가 하는 생각은 온당하다는 사실을 항상 일깨워 주는.” 교수 생활을 하면서 느껴 왔던 억압적 교육 현실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지난해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비디오로도 봤으나 미처 못 느꼈던 사실들이 문자를 통해 새삼 한국의 현실과 중첩된 탓이었다.

“나보다 연하의 대통령은 처음”이라는 말로 선생은 현정권에 대해 운을 뗐다. 그는 “현재 노무현 정권은 문제의 숲이다.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며 “통일 등은 모두의 자존심을 살려가며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송두율씨에 관해서는 “왜 자꾸 뒤집는가”라며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난 선생은 어머니의 저녁상을 봐 드려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노모의 수발을 드는 딸의 모습이었다. “선도 못 보고, 아니 볼 기회도 없어, 밀려 밀려 살다 보니” 선생은 독신이다. 박사여서 남자들이 부담이 많았겠거니,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11월 12일, 부산 동아대에서 생활 과학과 가정 운동에 대해 강연하는 선생을 보게 될 것이다. 가건모 회장으로서의 무게가 실린 자리다. 또 ‘쌀 많이 먹기 운동 본부’의 수장으로 남아도는 쌀문제도 풀어야 한다. 그렇게, 또 다른 30년이 막 펼쳐 졌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3-10-30 16:40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