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프레소] 신광식, 재즈 클라리넷 주자 출사표


역 뒤 하꼬방, 나이트 클럽, 군악대, 캠퍼스 숙식…. 그 와중에도 놓지 않은 끈이 있었다. 음악은 그의 남루한 생활에 허여된 한 줄기 가능성이었다. 클라리넷ㆍ색소폰 주자 신광식(44)이 앨범을 발표했다. 이제사 첫 앨범이다. ‘Memories Of You’. 출발은 클래식이었으나, 재즈 클라리넷 주자로서의 출사표를 내 놓은 것이다.

라이브 녹음이다. 또렷이 솟아 오르는 유려한 클라리넷음에 보내는 객석의 환호가 뒤늦은 출발을 축복하는 듯. ‘Body & Soul’, ‘Blue Moon’ 등 스탠더드 넘버 11곡이 수록돼 있다. 임민수(드럼), 이검(베이스), 성기문(피아노) 등 모두 후배 재즈맨들과 이뤄낸 연주다. 4월 14일 예술의 전당에서 펼쳐졌던 화제의 공연을 그대로 담은 앨범이다(재즈패밀리).

그의 클라리넷 소리는 유려하게, 때로는 요염하게 자유자재로 변신하며 즐거움을 선사한다. 칠순의 원로 이동기를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만한 클라리넷 주자가 없는 한국 재즈계에서, 그는 분명 하나의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재즈 클라리넷하면 베니 굿맨이나 에디 대니얼스 정도의 이름만 아는 한국의 재즈팬에게 그의 출현은 희소식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그것도 데뷔 앨범이라니.

그가 거쳐온 삶의 시간들에 자연히 시선이 간다. 충남예술대 기악과 84학번. 그러나 공부다운 공부는 8년 뒤에야 가능했다.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 때문이다. 고교를 졸업하던 1979년께,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전부터 불어 오던 클라리넷으로 클래식 음대에 가려 했으나, 레슨비도 감당하지 못 할 상태에서는 꿈을 접어야 했다. “나이트라도 나가서 돈을 벌겠다”고 하니 집에서 사 준 것이 35만원짜리 가짜 미제 색소폰이었다.

매형의 집에 얹혀 살며 화신극장의 밴드에서 첫 출발을 했다. 일당 1,500원은 서부역옆 하꼬방세와 담뱃값 대는 데만도 벅찼다. 다음으로 간 용산의 루비악단이란 데서는 4,000원으로 일당이 올라, 누나가 사 준 도시락을 까 먹으며 악보를 달달 외웠다. 희자매나 숙자매 등의 반주로 생활해 나갔다.

중학 밴드 시절부터 악보 읽기 훈련은 잘 돼 있던 터였다. 한 번 멀어진 클라리넷을 다시 잡는 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나이트 클럽 음악을 하는 와중에도 ‘음악 빚’을 갚아야 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잖아도 대전 충남대 음대에서 조교를 하고 있던 옛 친구들이 부르던 터에, 귀향을 택한 그는 허름한 클라리넷으로 기억을 더듬어 갔다.

“ 고물 에로이카 전축으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파고 들었어요.” KV(모차르트 작품 번호)622번에, 칼 라이스터의 연주였다. 그의 기막힌 기숙 생활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때. “수업이 없는 시간에 몰래 연습실에 들어 가, 학생들한테 빌린 클라리넷으로 불고 또 불었죠.” 그러나 84학번(31살)으로 입학해 보니, 이제 군대 문제는 도저히 연기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쫓기듯 방위병으로 입대한 그는 32사단 방위군악단에 배속돼 장교 회식때 허드렛 재즈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리운 캠퍼스로 돌아 온 그는 학교에서 스티로폼을 깔아 두고 거기 살았다. 수업 끝나면 곧 바로 야간 업소로 달려 가야했지만, 선배 노릇 하느라 학내 비리 데모 주동도 했다. 졸업 후, 한 전국 콩쿨에 나가 누가 봐도 월등한 연주를 들려 주었으나 겨우 입상했다. 인맥 없는 설움이었다. 울분을 삭히던 그에게 한 줄기 단비로 다가 온 것은 KBS 관현악단의 모집 공고였었다.

난해한 현대곡을 즉석 연주하는 이 늙다리 응모자는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하기 족했다. 91년 KBS 관현악단에 입단한 그는 신관웅, 정성조 등 두 쟁쟁한 선배의 권유로 재즈의 세계와 조우했다. 재즈 클럽 천년동안도와 문글로우에서 신관웅 빅 밴드, 정성조 재즈 앙상블의 수석 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연유다.

그러나 낭중지추. 7순으로 접어 든 이동기의 뒤를 이을 재즈 클라리넷 주자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서 구민회관 등지에서 재즈로 엮은 콘서트에서의 좋은 반응에 힘을 얻어 예술의전당으로 진출했고, 1장의 라이브 음반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12월께는 오페라 아리아와 동요를 재즈로 편곡해서 클라리넷으로 연주한 앨범이 선보일 작정이다. ‘신광식 클라리네-색소폰 아카데미’를 8년째 꾸려 오고 있다.

장병욱차장


입력시간 : 2003-11-04 15:41


장병욱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