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로의 시간여행, 그리고 천년고찰의 기막힌 풍경

[주말이 즐겁다] 벌교 낙안읍성과 송광사·선암사
조선시대로의 시간여행, 그리고 천년고찰의 기막힌 풍경

스산한 바람이 불 때마다 빌딩숲 사이엔 낙엽이 어지럽게 뒹군다. 이별하려는 연인에게 가을엔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는 노래도 있지만, 지금은 가을 스스로 이별 채비를 하고 있는 11월. 떠나려는 가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한켠이 썰물처럼 허전하다. 더 늦기 전에 이 가을을 배웅하러 떠나보자.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남도는 가을이 가장 늦게까지 서성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호남고속도로 송광사 나들목을 벗어나면 곧 호남정맥 조계산(884m) 기슭의 송광사(松廣寺). 벚나무의 붉은 낙엽이 마중 나온 절집으로 들어선다. 가을 냄새 가득한 비림(碑林)에선 송광사의 승맥을 이어온 고승들의 숨결이 뜨겁다. 일주문 돌계단엔 돌사자가 반가사유상처럼 한발을 턱에 고이고, 계절 묵상에 깊이 잠겨있다.

단풍잎 떠내려가는 계류의 우화각을 건너면 사천왕문. 절에서 국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한 밥을 저장하던 ‘비사리구시’가 눈길을 끈다. 여기에 4,000 명분의 밥을 담았다 하니 송광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송광사는 1,200여년 전인 신라 말 혜린선사가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절집이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이 나라의 지원을 받아 중창한 후 수선사라 고쳐 불렸다가, 당시 한국 선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후 이 절집은 보조국사를 1세로 해서 열여섯 분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僧寶)사찰의 명성을 얻으며 한국 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자리잡았다. 유산도 많아 국보 3점(목조삼존불감, 고려 고종 제서, 국사전)과 많은 보물(대반열반경소, 약사전, 영산전, 십육국사진영 등)들을 둘러보는 재미도 적지 않다.


타임머신 타고 떠나는 시간여행

송광사를 빠져 나와 조계산 남쪽을 휘돌아 가면 30분쯤 만에 낙안읍성. 성벽 너머로 펼쳐진 낙안들판의 황금물결…. 벌써 추수 끝낸 논도 보인다. 허나 남도의 가을은 이렇듯 텅 빈 들판조차도 넉넉하다.

성안 풍경은 조선시대. 서로 처마를 잇댄 초가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초가 사이 돌담엔 누런 호박덩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마당 한쪽의 텃밭엔 암탉 한 마리 햇살 아래 졸고 있다. 파란 하늘을 향해 팔 벌린 감나무 가지엔 붉은 홍시 몇 개 까치밥으로 남아있고…. 조선의 늦가을 풍경이 이러했을까.

구불구불 돌담 골목길 지나면 주막거리. 정겨운 주막집을 골라 들어선다. 괜히 “주모, 술 한잔 주쇼.” 하며 조선시대 과객 흉내를 내고 싶다. 주안상이 나온다. 막걸리도 좋지만 낙안의 전통주인 사삼주도 괜찮다. 사삼주의 독특한 향을 들이키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부침개 한 점 들면 조선시대 과객이 따로 없다.

성안에선 가을 주말이면 찾아온 길손들을 위한 놀이마당도 펼쳐진다. 가야금병창, 장구놀이, 사물놀이, 그리고 품바공연…. 물론 판소리도 빠지지 않는다. 읍성에서 벌어지는 흥겨운 전통 놀이는 현대화된 공연장에서의 그것과는 비교 못할 감칠맛이 있다. 11월엔 8~9일과 15~16일 14:00부터 16:00 사이에 열린다.

낙안읍성에서 조선시대 과객의 정취를 맛본 다음 선암사(仙巖寺)로 향한다. 이른 봄날 매화, 벚꽃 같은 온갖 봄꽃들이 활짝 피면 절집 전체가 한송이 꽃으로 변하는 선암사. 봄이 예쁜 절집은 가을도 아름다운 법 아닌가.

상사호 옥빛 물결을 훔쳐보며 들어선 절집. 가을빛으로 물든 숲길에 승선교(보물 제400호)가 반갑다. 속세의 온갖 번뇌와 욕심을 씻고 선계로 가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바람도 없는데 돌다리에 툭 하고 떨어지는 낙엽은 세속의 욕심도 이렇게 놓으라는 부처의 가르침인가.

이어 아리따운 자태의 강선루 지나면 도선국사가 직접 만들었다는 작은 연못 ‘삼인당’. 물결은 잔잔한데 일주문 너머에서 낭랑한 독경소리가 들려온다. 도를 향한 행자들의 뜨거운 눈빛에 늦가을 단풍도 무색하다. 나지막한 돌담을 넘은 가을 바람이 풍경을 뒤흔든다.

선암사 해우소는 ‘볼일’ 없어도 한번쯤 들르는 곳. 건축물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깊이(?)에 있어서도 무척 유명하다. 옛날 산 너머 송광사 스님이 솥이 크다며 사세를 자랑하자 선암사 스님이 했다는 대꾸 한 마디. “우리 절 뒷간은 얼마나 깊은지 어제 눈 똥이 아직도 떨어지는 중이라네. 아마 내일 아침녘에야 소리가 들릴 거라네.”

다선일여(茶禪一如) 전통의 맥을 잇고 있는 선암사엔 800년 된 야생차밭이 있다. 차맛을 가르는 건 물맛이고, 가장 좋은 물은 차가 자라는 곳에서 나는 샘물이라 했던가. 물론 선암사에도 차맛에 어울리는 맑고 그윽한 샘물이 넘쳐흐른다.

산사를 벗어나는 길목. 참지 못하고 작은 연못 앞 선각당(先覺堂)에 들러 차 한잔 음미한다. 산사의 늦가을이 따뜻하게 입안에 번진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고 부추긴 시인은 누구인가. 어두워진 숲에 낙엽이 우수수 지고 있다.


교통 호남고속도로 송광사 나들목→27번 국도(벌교 방면)→8km→송광사 입구→27번 국도→15km→외서면 소재지→6km→낙안읍성→857 지방도→15km→선암사 입구→4km→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


숙식 낙안읍성 민속마을 주막거리에 요기할 수 있는 식당이 여러 군데 있고 민박집도 많다. 성밖에도 숙식할 곳이 있다. 송광사 입구엔 길상식당(061-755-2173) 등 산채비빔밥 전문집을 비롯해 숙식할 곳이 많다. 문의 낙안읍성 관리사무소(061-749-3347 www.nagan.or.kr).

입력시간 : 2003-11-0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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