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갈려 할퀴는 풍토, 야극화는 극복해야 할 유산"

[한국초대석] 문화평론가 김병익
"패 갈려 할퀴는 풍토, 야극화는 극복해야 할 유산"

“우리 나라는 지식 사회든 일반 사회든 바닥에 깔린 생각이, 그 뭐랄까요…”라며 뜸을 들였다. 달변의 말투가 그렇게 변해가는 것은 요즘 한국 사회가 돌아 가는 모양새가 쾌도난마를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 접어 들었다는 증표이리라.

10월 30일 청와대에서 마련한 문화 예술인 오찬에 참석하고 막 나온 평론가 김병익(65ㆍ인하대 국문과 초빙 교수)씨의 표정은 따스한 초겨울 햇살 덕에 제법 상기돼 있었다.

문화의 달이었던 이번 10월의 의미는 그에게 남달랐다. 20일 문화 각분야의 원로들에게 수여되는 ‘보관훈장’ 수상자로 결정돼 청와대에 들어 가 상을 받았다. 평론가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돼 들른 그 자리에는 천상병, 신동엽 시인의 미망인도 나와, 감회에 젖었다.

지방과 서울 문인들의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열린 자리였다. 기존의 문예 진흥 기금을 로또 복권 수익금으로 충당한다거나, 열악한 지역 문화 살리기 재정 지원책 등 실제적인 차원의 문화 정책들도 30여분 동안 이야기됐던 자리였다. “열심히 노력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화에 대한 접근 방식이 이전 정권보다는 구체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죠.”


문화권력간의 쟁투에 큰 우려

그러나 문화외적인 데로 옮아가자 그의 어조는 한층 날카로워 졌다. “이 편, 저 편 갈라서 할퀴는 풍토로 귀결되고 말죠. 증오라고까지 해야 할!”바로, 말이 잠시 끊겼던 부분이다. 그는 한국 특유의 양극화 현상이 최근 들어 범사회적으로 더욱 증폭돼 가는 양상을 지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호 배제의 정도를 넘어 서, 숫제 아예 무시하는 상황이죠.”인터넷 공간을 달구고 있는 각종 안티 운동, 조ㆍ중ㆍ동과 여타 신문 간의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싸움, 문화 권력들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쟁투 등등을 그 예로 들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같은 양상이 정책으로 이어지지 못 하고, 물리적 싸움과 갈등의 차원에 그치고 만다는 데 있다는 우려다.

“유신 통치의 경험이 남긴 사회적 유산”이라고 선생은 단정했다. 박정희 정권이 모든 국민을 친체제 아니면 반체제라는 잣대로 양단한 뒤, 반체제쪽을 무자비하게 탄압함으로써 파생된 심리적 정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전두환 정권이 혹독한 군부 통치로 그 같은 상황을 가속화시켰다는 분석이다. “결국 그것이 심리적으로 내면화된 거죠.”진정한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비록 문화권 내부라고는 해도 YS와 DJ 시절에는 (구심점이) 리더십에 의해 유지됐으나, 현정권에 이르러서는 부정적인 모습만 부각되는군요.” 이제는 친(親)정권과 반(反)정권 세력 간의 갈등, 386을 기준으로 한 세대 갈등 등의 양상으로 불거져만 간다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측이 사회적으로 부상하면서, 거기에 배제된 세력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흑백 차별의 과거를 공개리에 스스로 고백하고 난 뒤, 사면시킨 것도 유효한 참고 사례겠죠.”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 자금의 규모가 구조적으로 볼 때 법의 권역 외부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있다.

“정치 구조를 개혁하든지, 고해 성사를 하든지 해야죠.”그래야 적어도,기업인들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돈을 내는 일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상 정립

그는 순수-참여로 대별되던 한국 문단의 전통적 대립 구조를 딛고, 비판적 지식인상을 촉구하고 수행해 왔다. 1971년에 썼던 ‘지성과 반지성’은 한국 지식인 사회가 거둬 들인 성과물로서 쉼없이 회자돼 왔다. ‘한 사람이 스스로 지성인임을 선언하는 것은 전폭적인 비극성을 내포한다’로 시작하는 원고지 글은 당시를 뛰어 넘어 통시대적 울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무심하게 행복을 향유하고 있을 때, 그 혜택을 증오하며 그 혜택 뒤에 숨은 결함의 그림자를 꼬집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일을 6년째, ‘문학과 지성’ 편집일을 1년째 하고 있을 때였죠.”1970년 가을 그와 평론가 김현ㆍ김치수, 변호사 황인철 등이 창간한 문ㆍ지는 창ㆍ비(창작과 비평)와 함께 한국 현대 문학의 양대 산맥으로서의 소임을 담당해 오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신생아 문ㆍ지에게 닥친 환경은 가혹했다. 때마침 박정희 정권이 채찍과 당근을 휘두르며 친체제 아니면 반체제로 국민들을 일도양단하고 있었다. 반공주의ㆍ대중문화 등과 동행하는 지식인들만을 옹호하는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풍토에서 한국을 읽어 낼 잣대를 찾아낸 것이다. “찬반론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경제 개발 사업은 꿋꿋이 진행되고 있었고, 기능주의적 지식인 사회만을 강요받던 때였죠.”

원래는 원고지 20여매만 일필휘지식으로 써두었으나, 문지 편집진이 쾌재를 부르는 바람에 80여매로 늘여 전재한 것이다. “지나고 보니 유치한 구석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로선 용기가 필요했던 발언이었죠.” 그 글은 이내 지식인 사회의 필독서가 된다. 정권을 비판하는 원고를 쓴 시인에게는 전화를 걸어 어휘 수정을 요구하던 때, 그 일을 맡기도 했던 그에게는 서릿발 같던 검열의 틈이 보였던 것이다.

당시 기자협회보에 검열을 피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표현을 고쳤는가를 썼더니(‘왜 기자로 남아 있는가’), 일본의 한 시사 주간지에서 완역되기도 했다. 그는 기사로 꼬투리를 잡힌 적은 없지만 1974년, 반정부 문인 서명에 연루돼 남산에 가서 조사를 받고 나오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기자협회회장직을 맡은 덕에 몸 담고 있던 동아일보와 갈등도 심화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는 대외활동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며 무기 정직 처분으로 답했다. 회사 대신, 기자협회 사무실(현재 프레스센터)로 출근했다. 그해 10월 중순, 기자협회장에 선출된 그는 1주일 뒤인 10월 24일 ‘언론자유선언’을 선포, 일선 기자들에게 급속 전파된다. 광고 탄압과 해직 조치 등으로 칼을 휘두르던 정부의 조치에 그는 농성 등으로 대응했다. 1년 뒤, 공식 해직된 그는 약간의 퇴직금을 받고는 신문사와의 연을 끊었다.


'문ㆍ지'는 숨쉬는 정신적 자산

1975년 12월 평론가 김현의 발의로 청진동에다 연 7평짜리 사무실은 사실 열화당과 공동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열화당 이기웅 사장과 나, 이렇게 사장은 둘에다 급사는 하나인, 말뿐의 사무실이었죠.” 몇 달 뒤 정식 사무실을 얻은 문학과 지성사는 그 혼자서 발행ㆍ편집ㆍ교정을 다 맡다시피 해 왔다. 그 세월도 길지 못 했다.

“1980년 어느날 뉴스를 보니 창ㆍ비와 함께 폐간됐다는 소식이 나오더군요.” 이어 받은 공문서에는 ‘정기간행물법 위반’이라고 단 한 줄 적혀 있었을 뿐이었다. 10주년 기념호(통권 46호)는 그래서 빛을 볼 수 없었다. 그 비운의 책이 빛을 본 것은 1990년 김현씨가, 1993년 황인철씨가 작고한 뒤, 교정쇄의 형태로 30부 나온 게 전부다. “친구들끼리 나눠 가졌죠.”

그러나 문ㆍ지는 살아 있다. 동인지가 아니라, 다음 세대로 전승돼야 할 정신적 자산으로서. 1994년 주식회사 형태로 만들어 대표 이사를 두 번 지냈던 그는 2000년 채호기씨에게 물려주고 현재는 고문으로서 일주일에 한 번꼴로 들른다. 김주연, 김치수, 황동규, 김원일, 정현종 등 원로의, 그러나 또래의 문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자칭 3급의 실력으로 바둑을 두고 회식도 한다. 술도 전혀 안 하고. 노래방도 안 가고, 자동차 운전도 안 한다. 2001년부터는 인하대 국문과 초빙교수로 학부(‘한국 문학의 이해’), 대학원(‘비평 방법론 연구’)를 강의하고 있다. 인터넷 매체인 업코리아나 종이 신문의 인기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자기 쇄신, 시쳇말로 업 그레이드를 게을리 않는 덕택이다. 그의 사고 체계는 항상 굴신 운동을 하고 주위 사물에 조응한다. ‘나는 아날로그 세대다. 문명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 이 전환기에 구세대가 끼어 있으면 서로 불편하다’고 그는 1990년대의 막바지에 한 에세이에 썼다.

거기에는 신지식 경쟁에서 따라갈 수 없다는 현실, 또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 얘기할 수는 있으되 자신의 체질도 관점도 아니라는 또 다른 현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나의 호불호를 떠나, 완전히 새로운 문화요. 구세대는 비낄 수 밖에 없는.” 무슨 얘긴가?


인문학은 세계화에 맞설 유일한 길

“디지털이 갖고 있는 비인간성을 아날로그가 채워줘야 해요. 안티-갈등-증오로 간명하게 분리된 세계에, 내속에 네가 있고 네속에 내가 있다는 진실을 깨우쳐 줘야 해요. 바로, 노인들의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죠.” 우리 시대가 잃어 버린, ‘호혜적 경쟁 관계’를 이뤄야 한다는 것.

위기 상황으로만 내몰리는 인문학이야말로 세계화와 신지식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이라는 지적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불행히도 묵은 사유법이 돼 버린 인문학의 무력감은 감당하기도 힘든 지경이다. 대표적 분야인 문학마저 변질된 세상이지만, 비평 활동은 완강하다”라는 진술은 거부 못 할 중량감으로 다가온다.

10월 29일, 그는 연세대 의대가 주최한 세미나 ‘의과대학에서 문학 교육은 어떻게 할까’에서 토론자로 초청받았다. 그는 이를 두고 “균형 감각 찾기의 몸짓”이라 말했다. 미국서는 20년째 문학이 의대 교과 과정의 필수이지만 국내는 작년부터 겨우 논의된 테마다.

세미나에서 그는 “디지털, 포스트모더니즘, 신지식, 정보화의 대극에서 인문학, 느림, 비실용성의 추구도 공존해야 함”을 강조했다. “빵도, 옷도 주지 못 하는, 어찌 보면 가장 무력한 문학을 통해 자유와 풍요를 얻는 거죠. 돈벌이가 되면 문학은 억압으로 변해요.” 바로, ‘무용의 무용(無用)의 무(無)’라는 찬란한 가능성의 현현으로서의 문학이고 인문학이다.

그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것은 20대부터다. 1980년대초, 이청준 조형준씨와 함께 유럽을 돌 때, 그 곳 문인들로부터 “한국인들은 머리가 모두 희냐?”는 우스개 반의 질문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선생은 그렇게 된 게 낙천적으로 살아서 그렇다는 독특한 답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커피는 에스프레소, 그것도 더블이다. 1983년 두번째로 유럽 갔을 때, 로마에서 처음 맛 본 후, 그 맛을 잊지 못 한다는 것. 게다가 담배는 하루 적어도 1갑에서 1갑반이다.

과연, 다독(多讀)의 힘으로 다작(多作)하고 다상량(多商量)한 업보 답다. 선생이 이미 30년전 절묘하게 표현했던 바, ‘즐거운 지옥’에서 사는 대가(對價) 중 하나 아닐까.

입력시간 : 2003-11-0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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