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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문화읽기] 부유하는 자유 '쿨'


한국사회의 어두운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쿨(cool)이라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용어가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쿨이라는 말이 문화적으로 사용된 지는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소수의 젊은 세대들을 특징지을 수 있는 문화적인 지표 정도로 여겨졌을 따름이다.

하지만 청년실업과 고용불안이 구조화되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쿨은 문화적인 감수성을 표현하는 기술적인 용어의 차원을 벗어나 한국사회의 내밀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마술적인 용어로 떠오르고 있다.

쿨은 매우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말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쿨은 좋다, 멋지다, 세련되다, 유행에 맞는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쿨의 일차적인 의미는 도시적인 문화적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는 세련됨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또한 쿨은 세련된 패션에 상응하는 감정처리 방식과 사회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쿨은 무언가에 집착하지 않는 깔끔한 감정처리 방식이며, 적절히 친절하지만 감정적으로 얽매이지 않는 사회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쿨은 가족이나 직장과 같은 사회적 완충지대가 안정성을 유지했던 시대와 작별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성에 근거한 인간관계들마저 극심한 불안정성에 노출되었고, 취업과 고용의 불확실성이 지배적인 구조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쿨은 한국사회의 불안한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쿨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쿨은 특정한 사회현상이나 유행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반응하는 개인적 태도들의 (비체계적인) 체계이다. 그래서 쿨의 일반적인 원리나 일관된 표상을 찾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사회적으로 실체가 확인되는 집합적인 표상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 따라 제시되는 삶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무척이나 다층적이며 혼란스러울 정도로 분산적이다. 물론 쿨은 촌스러운 것과 세련된 것을 구별하면서 세련된 것을 규정하는 감각적인 태도이다. 그렇기는 해도 과연 어떤 것이 세련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관계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비슷한 상황에서는 비슷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쿨하지 않은 태도인 셈이다.

쿨하다는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구속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속하지도 않는다. 한국의 온정주의적인 관계형성방식을 생각한다면 쿨한 태도가 이질적이고 이기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적(계약적) 관계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상호결속의 인간적인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 종전의 코드였다면, 쿨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호적인 탈(脫)구속성의 구현을 의미한다. 구속의 흔적들을 삭제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아를 구성하고 관계를 형성해 나가고자 하는 사회적 태도이자 삶의 스타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쿨은 포스트잇을 닮았다. 포스트잇은 어디에나 붙일 수 있고 필요한 곳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그 어느 곳에도 고정되지 않는다.

특히 포스트잇을 붙였다 떼어낸 자리에는 쿨하게도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포스트잇의 이러한 특징들은 주어진 상황에는 적절하게 대처하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주지 않고 부유하는 개인들의 이미지와 매우 유사하다. 포스트잇처럼 쿨은 유동하는 자유를 욕망한다. 그것은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 바 있는, ‘~으로부터의 자유’도 아니고 ‘~에로의 자유’도 아니다. 쿨의 자유로움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자유가 아니라 세계와 무관해지고자 하는 자유이다.

쿨에 배어있는 자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쿨의 자유는 욕망의 운동성과 내밀하게 결합되어 유동하는 자유이다. 쿨은 세계에 대해서는 결코 올인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만 낮은 수준에서 올인할 따름이다.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는 주체의 욕망이 정체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가능한 즐거움에 치중함으로써 낮은 기대치를 가지고 불확실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간다.

우리는 여전히 세계와의 화해를 꿈꾸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존재의 자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쿨은 세계와 존재가 겉도는 양상, 달리 말하면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세계가 나를 받아줄 가능성도 크지 않고 세계로부터 배신당하거나 버림받을 확률이 큰 상황이라면, 세계 속에 나를 표현하는 일도 싫고 내 속에 세계를 들여놓기도 싫다는 것이? 묘한 이중의 부정 속에서 자아가 균형을 잡는다. 쿨이 세계로부터 예상되는 모든 억압에 대한 자아방어기제라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쿨은 가치부재의 상황을 살아나가는 현대인들의 집단적인 냉소이자 자기배려가 아닐까.



김동식 문화평론가 tympan@empal.com


입력시간 : 2003-11-1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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