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정신으로 뭉쳐 국내 라이브 무대 정착

[추억의 LP여행] 들국화(下)
비틀즈 정신으로 뭉쳐 국내 라이브 무대 정착

이대 입구에 있던 음악 카페 ‘모노’는 포크 가수 양병집씨가 경영하던 언더 그라운드 가수들의 집합소였다. 개업 날 전인권은 차분한 성격에 개성이 강한 음악을 들려 주는 최성원을 만났다. 이것이 사실상 들국화의 시작이었다. 보컬 전인권, 베이스기타 최성원, 건반 허성욱으로 이뤄진 ‘전인권 트리오’였다.

모노가 적자 운영으로 문을 닫자 81년부터 조용호 PD가 운영하던 음악 카페 ‘뮤직 라보’에 출연했다. 뮤직 라보는 후에 장안의 명소가 된 디스코테크 ‘루머스’의 전신이다. 이 당시 트리오의 주 레퍼토리는 빌리 조엘이나 그룹 이글스 등의 조용한 멜로디였으나, 최성원의 ‘매일 그대와’등 창작곡도 불렀다.

노래가 다운타운에 흘러 가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삼총사는 공연이 끝나면 항상 이태원, 신촌, 방배동 등지의 밤거리에 기타를 둘러 메고 돌아 다니며 장래의 꿈을 이야기했다. 히트곡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도 이 당시 만들어 진 곡. 당시 방배동의 연주실 이트는 그들의 아지트였다.

전인권과 더불어 록 그룹 들국화의 또 다른 주역은 전인권에게 음악적 영향을 준 최성원. 그는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최영섭씨의 아들이다. 고려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을 버리고 들국화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했다.

휘문고 1학년 때부터 기타를 잡았던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답게 음악보다 우정을 더 중시했다. 84년 5월 각자의 의견 차이로 일시동안 음악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따금 음악적 마찰이 빚어지던 중 전인권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충격으로 전인권은 두문불출했다.

그때 고려대 농대시절 그룹 코리안 스톤스의 멤버로 들국화의 히트곡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를 작곡한 오랜 음악 친구 조덕환이 찾아왔다. 술을 끊고 건강을 다지고 있던 어느 날, 최성원이 악보를 들고 찾아왔다. 옴니버스 앨범인 ‘우리 노래 전시회’의 제작을 맡은 그의 권유로 전인권은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불렀다. 음반은 제법 호평을 얻어냈다.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들국화'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84년 최초의 헤비메틀 그룹 '무당'의 롯데호텔 공연에서 게스트 출연한 것이 들국화의 첫 무대였다. 85년 1월 그룹 들국화는 동숭동 파랑새소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별반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1백10석의 객석을 훨씬 넘는 250명의 관객이 매일 몰려 들었다.

홍보도 하지 않았던 이들은 10회 연속 연장 공연을 해야 할 만큼 밀려드는 관객들을 보며 가슴이 뛰었다. 때 마침 신중현씨가 이태원에 라이브 홀을 열고 초청을 해왔다. 이후 고정 출연을 하면서 기타 최구희, 드럼 주찬권이 주축이 된 6인조 그룹 ‘믿음 소망 사랑’과 어울렸다.

최구희, 주찬권에게 세션을 부탁해 마침내 록 역사에 기념비적인 1집 앨범 ‘들국화’가 85년 9월 빛을 보았다. 비틀스의 마지막 앨범을 카피한 앨범 재킷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비틀즈의 정신을 잇는 그룹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디자인이었다. 이 음반은 국내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수준높은 음악성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9년, 들국화 1집은 21명의 음악 산업 관계자들이 참여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당당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집 발표 후 ‘추억 들국화’라는 타이틀로 전국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신촌 크리스탈 소극장, 파고다극장을 시작으로 대구 동아쇼핑센터, 부산 가톨릭 문화센터와 문화체육관, 부산 이사벨여고, 대구대 강당, 춘천 시민회관등을 6개월 간 돌았다. 파고다극장 공연 때부터 허성욱의 친구였던 손진태가 세컨드 기타로 가세했다.

많은 관객들이 몰려들었지만 조명ㆍ음향 등 장비 대여비로 나가는 바람에 돈을 벌지는 못했다. 이는 지금도 여전한 국내 공연 환경의 숙제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매일 그대와' 등 그들의 노래는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곧 이어 86년엔 '들국화 라이브 콘서트'와 2집을 발표했다. 2집에서는 조덕환이 빠지고 최구희, 손진태, 주찬권이 정식으로 가입했다. 이후 헤비메탈 그룹 H2O의 매니저 이한종의 제의로 2개월 간 미국 순회 공연을 벌여 교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이후 87년 멤버들이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들국화는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무수한 악성 루머가 난무했다. 이에 전인권은 "나는 록, 최성원은 포크, 주찬권은 브리티시 록, 손진태는 재즈를 하기 위해 들국화를 포기했던 것"이라고 항변했다. '따로 또 같이'의 리더였던 이주원은 "초기 들국화 멤버 4명은 음악적으로 최고였다“며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4집까지만 냈더라면 록의 가요화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아쉬워 했다.

솔로로 독립한 전인권은 87년 허성욱과 함께 '추억 들국화 머리에 꽃을'에 이어 88년 명반으로 평가받는 솔로 데뷔음반 '전인권' 1집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이때 삼청동 판잣집에 파랑새 기획이라는 스튜디오를 꾸미고 박청귀와 함께 록 그룹 가야를 만들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록 음악을 꿈꾸며 창단한 그룹이었다.

이후 89년 '지금까지 또 이제부터', 91년 OST앨범 '자유', 93년 '전인권 라이브 1-3'으로 꾸준하게 음악 생활을 이어갔다. 94년에는 강인원이 주도한 '느티나무 언덕 1집'에 참여했다.

1980년대 600회에 달하는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달성한 들국화는 국내에 라이브 무대를 정착시킨 주인공이다. 그러나 데뷔 음반에서 보여주었던 완벽에 가까운 음악성이 단발에 그치고 만 사실은 한국 대중 음악계의 크나 큰 손실 이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은 동의한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3-11-20 16:08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