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낭만적 책 읽기


근대 이후에도 낭독 또는 낭송의 전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김병익의 ‘한국문단사’에 의하면, 1920년 YMCA에서 ‘폐허’동인들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시 낭송회가 개최되었다. 역사학자 이병도의 사회로 낭독회가 개최되었고, 이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열성적으로 읽어 내려가 관객들의 힘찬 박수를 받았다.

당시에 염상섭을 비롯한 ‘폐허’동인들은 목덜미까지 흘러내리는 장발을 하고 대낮부터 취해서 몰려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술꾼들의 명성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시인 황석우가 전작(前酌) 때문에 덜덜 떨면서 시를 낭송해 관중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참으로 낭만적인 풍경이다. 아마도 이때의 시 낭독회가 고등학교 축제의 단골 메뉴인 시화전이나 문학의 밤 행사로 이어졌던 것이리라.

초창기의 영문학자인 권중휘의 회고에 의하면, 19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농촌 지방에서는 소설을 낭독하고 경청하는 일이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권중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쳤는데, 소설을 읽으면 동네 노인들이 와서 듣곤 했다. 평소에 동네 노인들이 며느리들에게 하는 짓을 보면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었는데, 책 속에 같은 내용의 악행이 나오게 되면 평소 자신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온갖 비난을 하면서 마치 도덕군자처럼 구는 모습이 우습게 보였다고 한다. 추측컨대 지방에서 소설 낭독의 전통은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3편’을 보면, 문맹이었던 김두한이 박계주의 소설 ‘순애보’(1939)를 읽기 위해 남녀학생을 납치하듯이 잡아와 소설을 읽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학생들이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낭독에 몰입하고, 소설을 다 들은 김두한은 땅바닥을 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월사금에 해당하는 수고비가 지불된다. 낭독은 문맹인 사람들이 문화적ㆍ문학적 경험을 향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낭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낭송의 관행을 보여주는 기록도 눈에 띈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낭만적인 회고를 잠시 들여다보자. 이야기와 관련된 기억이 판타지의 형태로 과거의 시간을 보존하고 있다.

겨울밤엔 고구마나 감, 그것이 아니면 하다못해 동치미라도 먹을거리로 내놓으시고, 나직한 목소리로 아벨과 카인의 얘기를,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수절 과부의 얘기를, 도적질하다가 벌을 받은 그녀의 친지 중의 한 사람 얘기를 어머니는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 하신다. 그때에 내가 느낀 공포와 아픔, 고통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 아픔이나 고통 밑에 있는, 어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주는 쾌감을 내가 얼마나 즐겨했던가!

어머니의 무릎을 통해서 느껴지는 온기, 어린 소년의 귀에 전달되는 숨결의 간지러움, 그리고 큰 입을 벌리고 달려들 것 같은 무서운 이야기. 이야기를 듣는 일은 청각에 국한된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몸의 모든 감각이 동원되는 살아있는 경험인 것이다. 온몸을 감싸는 이야기의 느낌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었던 태아의 감각을 상상적으로나마 재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와 유사하게 스필버그의 영화 ‘A.I.’에는 모성(母性)과 책읽기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로봇 데이빗은 아들에게 ‘피노키오’를 읽어주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진짜 엄마를 가진 아들이 되고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책 읽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자애로운 모성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이다.

낭독의 감각적인 낭만성을 보여주는 소설로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주인공 마리는 오랜 ‘백조’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책 읽어주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로 사춘기 소년, 장군 부인, 사업가 등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마리의 고객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신들 속에 숨어있던 진정한 욕망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욕망들이 세계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한 마디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지만, 책읽기는 자기 자신만의 내면세계로의 칩거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고 소통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지적처럼, 경험이 기능화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야기 문화가 쇠퇴한다. 그리고 이야기 문화의 감소는 경험을 교환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한다. 돌이키기 어려운 사회적 변화겠지만, 되돌아보는 낭만은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 사랑하는 가족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달라고 부탁해보는 일은 어떨까. 인@?음성이 얼마나 고유하고 아름다운지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보졸레 누보가 없어도 충분히 낭만적인 가을일 수 있을 것 같다.

입력시간 : 2003-11-25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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