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속살서 풍기는 향기로 가득

[재즈 프레소] 야누스 탄생 25년과 박성연
재즈의 속살서 풍기는 향기로 가득

5주년이다, 10주년이다, 업체나 기관의 기념 행사 제목에 유행처럼 쓰이는 문구다. 외부에 어떻게든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한껏 내세워 보자는 속내가 단번에 읽힌다. 그러나 박성연에 관한 한 그것은 세월의 힘을 버텨 내는 큰 힘이었다. 이번에는 ‘탄생 25주년’이다. 그의 분신인 야누스가 탄생한 지 딱 사반세기가 됐다는 뜻이다.

재즈라는 소수의 음악이 현재 한국의 문화지형도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게 기까지의 문화사에서, 그의 분투를 빼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다. 재즈가 소수를 위한 마니아용 문화에서 이렇듯 당당히 자기 존재를 과시하기까지, 그 정점에는 박성연이 있었다. 즉, 야누스가 있었다는 뜻이다.

1978년, 국철 신촌역 옆 시장의 한 건물 2층에서 문을 열었다. 국내 최초의 재즈 클럽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집값 임대료에 떠밀려 대학로 등지를 전전하다 여기까지 왔다. 손님 두세명을 두고 공연을 펼치는 경우도 있지만,그는 적어도 매달 한번씩 펼치는 정기 공연만큼은 빠트린 적이 없다. 그 세월은 곧 한국 재즈사이다.

이제 그를 단순히 재즈 보컬이라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언제부터가 그의 이름 앞에는 ‘한국 재즈의 대모(代母)’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또 당연히 따라 붙기 시작했다. 사반세기 동안 쌓여 온 내공이 빛을 발했다.

11월 22~23일 이틀 동안 열렸던 ‘야누스 탄생 25주년’ 콘서트는 한국 재즈의 과거에서 미래가 어우러진 현장이었다. 오후 8시에 시작해 자정까지로 계획된 자리였지만, 다음날 새벽까지 술술 넘어 갔다. 피끓는 10~20대의 레이브 파티도 아닌 터에. 20대에서 50대까지, 현재 한국의 재즈를 이끌어 가는 힘이 한자리에 결집된 것이다.

첫날인 22일, 임인건 프로젝트와 신예 보컬 인순이, 신관웅 빅 밴드와 김준, 이정식의 서울 재즈 쿼텟과 박지우 등 연주인과 보컬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중견과 신진 세력을 적절히 조화시킨 기획력이 돋보인다. 자정께 준비된 무대는 다 끝났다. 그러나 현장을 가득 메운 200여 관객들은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미술과 패션 등 예술계에서 신예ㆍ중견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처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더 듣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4반세기 동안 야누스를 이끌어 온 박씨의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박성연은 적어도 야누스의 일에 관한 한, 행사 예정에는 물론 스케줄 바깥에서도 존재한다.

그날 문 닫기 직전 20여명 남은 손님들의 안달에 못 이겨 들려 준 노래가 샹송 ‘Autumn Leaves’와 빌리 할러데이의 ‘Don’t Explain’. “입 다물고 아무런 설명도 하지 말아요(Hush now, Don’t Explain).”재즈가 박성연인지, 박성연이 재즈인지, 장자가 말한 호접몽의 경지가 바로 그 자리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둘째날은 신구 세대의 공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신동진 쿼텟, 강대관 딕시랜드 밴드 등 중견에 임미정 쿼텟, 이미키, 웅산 등 신예의 당당함이 조화를 이뤄냈다. 여기에 프리 뮤직 타악 주자 김대환의 파격적 드럼 연주와 즉흥 무용가 양수림의 ‘몸짓’이 어우러져, 마치 한판의 전위 예술이 펼쳐지는 듯 했다. 사반세기 동안, 야누스의 주인 박성연이 항상 생각해 온 명제가 새삼 확인된 자리였다. “끝은 다른 시작과의 약속이죠.”

이번 무대가 빛났던 것은 초호화 출연진때문만은 아니다. 단골은 눈치챌 수 있었다. 소리가 전보다 훨씬 성숙돼 있었다는 사실을. 야누스의 초창기부터 이곳을 찾아 오다 지금은 40대가 된 한 사람이 제공한 앰프 덕분이다.

세계적으로 몇 대 남지 않은 명기 중의 명기, ‘웨스턴 M3’이 그 주인공. 부르는 게 값이라 하는 물건이다. 4~6억 정도 하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야누스가 끝나는 날까지 무료 대여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야누스의 마지막 은인이라고 생각해요.”최근 야누스가 고질병이던 적자에서 조금씩 헤어날 기미를 보이는 데에는 이 명기를 한 번 확인해 보려는 사람들이 퍼뜨린 입소문 덕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끝내 자신을 밝히려 하지 않고 있다. 오죽하면 박씨에게 성도 안 가르쳐 주었을까.

클래식이건 대중 문화건 가리지 않고 이른바 기획자들이 문화 권력을 독점해 시대적 풍경을 장악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러나 박성연과 그의 야누스는 패스트 푸드 시대에 새삼 각광 받는 슬로우 푸드처럼, 잘 발효된 재즈의 존재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 지를 입증해보이고 있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3-11-25 15:52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