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흩뿌려 놓은 기구한 삶의 편린들분단 이후의 아픔 그린 소설 프랑스서 출간

[한국 초대석] 단국대 불문과 정소성 교수
한국전쟁이 흩뿌려 놓은 기구한 삶의 편린들
분단 이후의 아픔 그린 소설 <두 아내> 프랑스서 출간


다음 대화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황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의 평균적 한국인이라면 충분히 개연성을 인정할 수 있는 대화 내용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역사가 희미해져 버리고 나서도 과연 그럴 것인지, 누구도 선뜻 장담하기 힘들다. 무슨 말인지, 한 번 엿들어 보자(괄호 안의 글은 원문에 없다.).

A:전쟁통에 나도 모르게 남으로 편입되었지. 내가 공화국을 위해 근무하던 지역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쪽의 땅이 되어 버렸어. 그래서 가족은 단 한 사람도 데리고 나오지 못 했어.

B:그럼 지금 부인은? A:남에서 재혼을 했어. 마침 고향에서 옛날 우리 집에서 머슴을 살던 사람이 역시 전쟁통에 죽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월남하였길래 그분의 맏딸과 재혼을 했다네. 그리고 월남 전에는 북에서 역시 우리 집안의 맏머슴을 하던 분의 맏딸과 결혼을 했었고.”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당연한 것이리라)

B:그럼 남과 북에 아내가 하나씩 있는 셈이군요? A:그런 셈이지. 북의 아내와는 이혼한 적이 없으니까. (문제의 조짐이 언뜻 보인다)

B:두 분 다 사랑하고 있습니까? A:그런 것 같아. 북의 아내는 그야말로 공화국의 정신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 같고, 남의 아내는 역시 자본주의 정신을 물려 받은 것 같아.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해. 둘 다 옳은 거야.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이리라. 대화를 좀 더 들어 보자)

-A: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데는 물론 남의 체제가 낫지만, 역시 북은 빈부의 차이를 없애려고 애쓰는 것만은 사실이야. 인간을 정치적 통제의 체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는 다소라도 북이 낫지 않을까?(저 말을 쉽게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더구나 남쪽의 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심화돼 가고 있는 요즘이고 보면 상당한 설득력까지 띠는 것 아닐까)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대화다. 남북 분단 상황이 한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두 명의 아내를 가진 사내로 치환시킨 것이다.

중견 작가이자 교수인 정소성(59ㆍ단국대 불어불문학)씨가 1999년에 발표한 열세번째 장편 소설 ‘두 아내’의 현재성은 저 같은 통찰덕에 여전히 빛을 발한다(찬섬刊). 특히나 흐렸다 개였다를 반복하는 남북 관계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으로 다가 온다.

제목의 두 아내란 요즘 인기 검색어인 불륜을 가리키는 것도, 가정 파괴를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한국적인 정황이 빚어낸 역사적 비극을 압축한다. 이 소설이 불어로 번역돼 프랑스 현지에 소개될 날이 멀지 않았다. 10월 15일~10월 17일까지 정씨가 파리에 머문 것이 전초 작업이었다.

“파리 제 8대학 어문학 교수 장 폴 데구트, 내 책을 번역 출간할 출판사 ‘새집과 장미 한 송이’사의 편집국장 폴 르느와르 등이 동석한 자리였어요.” 한강이 내려다 보인다는 점 때문에 5년 전 옮겨 온 옥수동 현대아파트 14층 45평에 오후의 초겨울 양광을 듬뿍 받으며 작가는 파리의 고급 한정식집에서 출판 계약 등을 위해 가졌던 만남을 돌이켰다. 2004년 2월까지 1년 동안의 안식년 덕분에 모처럼 여유를 찾은 일상이다.

밤이면 제법 그럴싸한 야경이 펼쳐지는 곳에서 그는 작품과 강의 준비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집안 곳곳이 문학 서적 아니면 관련 텍스트로 연구하는 비디오 더미다. 글과 글에 파묻혀 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생활에서 이번 일은 예외적 사건이다. 무엇보? 프랑스 측의 예사롭지 않은 관심 때문이다.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등 한국 작품을 이미 출판했던 경험이 있는 출판사다. 정씨의 책은 이른바 순수 문학이라기보다는 지극히 한국적인 역사적ㆍ이념적 정황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어서 의미가 다르다.

또 기존의 경우는 번역자와 출판사 간의 계약이었으나, 이번은 원저자와 출판사 간의 직접 계약이라는 점 역시 그 의의를 새삼 돌아보게 하는 부분이다. 1999년 4월 이 소설 두 권이 출간되자, 문예진흥원 산하의 한국문학번역원은 기다렸다는 듯 첫 사업 대상작으로 이 소설을 꼽았다. 한국의 비극을 가장 선명하게 묘사한 작품이라는 이유였다.

재불 번역가인 데다 고향이 이북 출신의 여류 번역 문학가 김진영(42)씨의 존재는 이번 작업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을 뜬 지 12년이 됐다는데도, 무엇보다 청진 사투리를 알아 듣더군요.”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라는 사실에 김씨는 “독어 영향을 많이 받은 프랑스 동북부의 알사스-로렌 사투리로 번역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먼저 제의해 올 정도였다. 연세대 국문과에서 국어를 제대로 공부하고 갔다는 사실도 큰 미덕이었다. 번역은 뭣보다 명확한 의미 전달이 중요하다는 정씨의 생각에 따라 결국 파리말로 낙착됐지만.

정씨의 최근 프랑스행은 개인적으로도, 한국의 문단 전체로 봐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1999년 출판된 ‘두 아내’가 불어로 번역돼 현지 출판을 앞두고 있다. 현재 프랑스측과 협의된 바로는 2004년 1월초에 프랑스어 완역본이 빛을 볼 예정이다. 그때와 맞춰 프랑스 언론의 문학 담당 기자들과의 인터뷰도 잡혀 있다.

“1,000만 월남 동포 중 2~3백만명이 남과 북 모두에 아내를 둔 사람이고, 1백만은 북에 아내를 두고 온 사람들일 것”이라고 작가는 추정했다. 바로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한국적 특수성이다. 북에서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전쟁이 터지자 생이별을 하는 바람에 홀로 남하한 후 또 가족을 이루게 된 사람은 자신이 교편을 쥐고 있는 대학에도 있다고 한다.

두 아내란 상황은 우리 민족의 특수한 정황이면서 동시에 보편적 이야기란 것. 그 근원에 6ㆍ25란 민족 최대의 비극이 있다. 바로 소설 하권에서 명확하게 제시돼 있는 대로다. 분단 고착화라며 우리가 입버릇처럼, 별 느낌도 없이 말해 온 상황에 숨어 있는 슬픈 현실이다.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미증유의 가족 파괴 현상이라고 작가는 강조했다. “전쟁 그 자체의 파괴성 뿐 아니라, 전후 상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이 남긴 현실을 이제는 똑바로 보자는 요청이다. “6ㆍ25를 눈으로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로서, 그 전쟁의 진면목을 전하고자 했다.

홍성원의 ‘남과 북’, 이호철의 ‘남녘 사람, 북녘 사람’, 최인훈의 ‘광장’이 6ㆍ25세대가 쓴 작품이라면 나는 그 직후의 세대로서 후일담을 그려 보이고 싶었다.”


한국전쟁의 진면목 후세에 전달

2년에 한번꼴로 새 소설을 발표, 전업 작가가 아님에도 부지런한 작가로 소문난 그는 이번 소설을 가리켜 “나의 대표작으로 생각하고 집필에 몰두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진면목을 후손에게 전한다는 마음이었다. 6ㆍ25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기 위해 관련 서적과 영상물을 접하는 것은 당연한 필수였다. 글과 글이 생생한 힘으로 다가 오는 데에는 그것은 물론, 무산 청진 사투리를 생생히 복원해 내기 위한 작가의 노력 덕택이다.

경기대 출판부에서 펴낸 ‘함경도 방언 사전’과 북한과학백과사전 출판사의 ‘방언사전’으로 주(主) 언어인 함경도 사투리를, 동국대 출판부 발행 ‘평안 언어 연구’를 통해 평안도 방언을 익혔던 결과다. 작품속의 무산-청진 사투리는 능란한 어휘력 덕분에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듯 다가온다.

언어의 재구와 더불어 이 소설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장면 장면이 무척이나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인민재판 과정을 그린 다음과 같은 대목은 사실주의를 넘어 극사실주의(hyper-realism)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 묘사하는 바, ‘똥구린내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것들이 사람을 묘하게 흥분시키는’ 인민 재판 현장은 이렇다.

‘뒷통수에서는 선지피가 솟구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누르께한 두부 같은 것이 주변에 쫙 흩어지는 것이었다.’ ‘린민’에 의해 악덕 지주로 지목돼 재판장에 오른 한 사람의 최후다. 이 책이 독자를 휘어 잡는 데에는 이 같은 치밀함이 구석구석 숨어 있는 덕택이다. 그것은 6ㆍ25가 그에게는 ‘근원적인 기억’이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당시 여섯살이었던 그는 영주군 부석면 부석지서 주임이었던 부친덕에 전쟁을 몸으로 기억한다. 카빈이나 99식 소총으로 소백산 빨치산을 향해 철부지沮?나서 사격해야 했던 것은 기억의 기저를 이뤘다.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대로 불려 가 저 유명한 영천 보천산 토벌전 이후 부친은 종적을 감췄다.

포로로 잡혀 가던 유도 6단의 부친이 금호강에 이르러 투신했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이었다. 이 같은 비극은 2002년 펴낸 소설집 ‘소설시대’ 중 ‘섬광’에 수록돼 있다(평민사).

그에게 새 소설이란 일종의 숨쉬기 방식이다. 또 그것으로 언론은 ‘인기 작가’라는 호칭까지 붙여 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아테네 가는 배’,….등 현실서 고뇌하는 지식인상을, ‘악령의 집’은 공포의 세계라는 낯선 소재를, ‘사랑의 원죄’는 전통적 윤리관이 해체되면서 여성에게 성의 자유가 주어짐으로써 빚어지는 일들을, ‘운명’은 세 번 결혼해야 했던 무속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한국에 엄존하는 샤머니즘의 집요함을 그려냈다.

남한땅을 답사하는 등 3년간의 작업끝에 쓴 ‘대동여지도’(2003년)는 현대물은 물론 역사물까지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 낼 수 있는 정씨의 능력이 새삼 인정돼 제 29회 월탄문학상이 수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결국 콧대 높은 프랑스가 그를 부른 것이다.


한국문학의 국제적 입지에 서글픔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찼을 이번 방불은 한국 문학의 세계적 입지를 똑똑히 확인하는 뜻밖의 기회이기도 했다.

“프랑스 최대의 서점인 프낙(FNAC)에 들러 보니, 일본과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고 할만할 두 작가의 책이 봉투에서 뜯지도 않은 채 놓여 있었던 데 반해, 일본은 서가 한 칸씩이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등 대표 작가의 작품이라는 현실을 똑똑히 확인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함부르크 대학 산하의 유럽 한국학회에 우리 정부의 지원이 년간 5만 달러죠. 일본의 1억 달러에 비할 수조차 없어요.”

“경제 대국에 스포츠 대국이라지만, 정작 문화쪽으로 오면 형편 없는 게 한국이예요.” 걱정은 끝이 없다. 이번 방불길에 새삼 확인하고 온 대로다. 요즘, 작업에 더욱 충실하고 싶은 이유다. 그는 비록 강의가 없는 날이라도 오후가 되면 학교 연구실에 가서 적어도 200자 원고지 5장은 넘는 분량으로 연재 소설을 써서 이 메일로 띄워 보낸다. 몇몇 언론사 홈 페이지에 연재중인 ‘사랑의 전설’과 ‘어둠의 의식’ 등 두 편이 그것이다.

형태만 바뀔 뿐, 글쓰는 일이란 결국 일상과의 지난한 승부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잖는가.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 2003-11-28 09:45


장병욱 차장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