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추억의 LP여행] 조용필(下)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신화

호사다마라고 할까. 유명세를 탄 조용필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 금지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당시 남산의 지하 취조실에 끌려가 주전자 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한 절망감에 이 땅을 뜨고 싶었다." 하지만 좌절보다는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나도록 판소리 공부에 전념했다.

77년 부산에서 '조용필과 그림자'를 재건했다. 79년 말, 해금 소식과 더불어 록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했다. 최초의 라인업은 현재까지 함께 하는 ‘검은 나비’ 출신의 드러머 이건태와 기타 곽경욱, 베이스 김택환, 그림자 출신 키보드 김청산. 모두 실력파 연주자들이었다.

리더 조용필은 보컬과 틈틈이 기타도 쳤다. 최이철을 비롯, 이호준 송홍섭 유재하 배수연 유영선 등 유난히 멤버 교체가 잦았지만 트로트에서 발라드ㆍ록ㆍ민요를 아우르는 조용필의 노래를 저마다 다른 색깔의 연주로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세션들의 실력 덕분이었다. 밤무대에서 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조용필은 수난을 안겨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의식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 발표한 조용필의 본격적인 1집 음반 <창밖의 여자/단발머리-지구,1980>은 일인 독재 시대를 알리는 힘찬 팡파르였다. 타이틀 곡 '창 밖의 여자'는 동아방송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였다. 종횡무진 내닫던 82년 어느 날 김청산, 김택환, 곽경욱이 '천하대장군'이란 그룹으로 독립해 튀어 나갔다.

그 자리엔 2기 멤버라 할 수 있는 베이스 송홍섭, 동방의 빛 출신 키보드 이호준, 기타 김석규가 들어왔다. 그 해 9월 자서전 '초혼의 노래'를 발간했다. 대중의 기호를 간파한 만능 엔터테이너 조용필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어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4집 <못 찾겠다 꾀꼬리/비련>은 이정표 격의 음반. 특히 '비련'은 일본인 작곡가 다니무라 신지와 저작권 시비를 벌이기는 했지만 첫 소절, '기도하는~' 다음에 터져 나왔던 소녀 팬들의 비명소리는 인상적이었다. 몇 번의 수정 지시를 맞았지만 광주 학살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노래한 '생명'이란 곡도 4집의 수록곡이었다.

또한 7집 <눈물로 보이는 그대>, 13집 은 가장 음악적으로 뛰어난 음반으로 꼽힌다.

80년대는 조용필의 독주시대였다. 그의 수상 경력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80월 11월. '창 밖의 여자'로 서울 국제 가요제 금상, '한오백년'으로 열창상 수상은 시작이었다. 80년부터 86년까지 내리 7년 동안 MBC 10대 가수왕 수상, KBS 방송가요대상(1980~1985)에 이어 81년 5월에는 '그 사랑 한이 되어'로 한국연극영화대상에서 주제가 작곡상을 수상했다.

7월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최초로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치렀다. 82년 4월엔 미국 암펙트사로부터 '미워 미워 미워'로 글든릴상을 수상했다. 일본 문화방송 개국 30주년 기념 아시아 뮤직 포럼 참가에 이어 5월엔 일본 NHK 리사이틀 홀 단독공연을 벌였다. 일본에서는 3장이나 5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는 골든디스크를 기록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국제적으로 넓혔다.

조용필은 86년부터 1년 간 무려 148회의 공연을 강행했던 무적함대였다. 일본에도 여러 팬클럽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만큼 슈퍼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일본에서 발매한 그의 수많은 앨범 때문에 "일본 사람이 되려 했다"는 오해를 살 만큼 그는 일본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삶과 직접적인 연관을 짓기보다는 '아이디어'로 생각한다. "음악이라는 것은 많은 음악을 들으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아이디어, 영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지 자기 삶이 순탄치 않고, 좀 그렇다 해서 음악에 연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조용필은 그만의 음악 세계가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가수는 하나의 '엔터테이너'이고, '노래 연기자'이다. 가수가 되어 인정을 받으려면 젊은 층에서 노년층 팬들까지 좋아하는 민요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내 장르로 들어가겠지만…" 매년 가수왕을 독점하던 그는 92년 '꿈'이후부터 TV출연을 자제하면서 인기 최정상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96년 16집 "바람의 노래"가 나올 땐 잠시 TV에 출연했지만 그의 모습은 TV에서 사라낫?

1999년 12월 27일,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 MBC라디오 '20세기 한국인의 노래 100곡'프로그램이 한국갤럽을 통해 20세 이상 1천명의 성인과 전문가 300명을 대상으로 금세기 최고의 가수와 노래를 조사한 결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선정되었다.

1999년 대중음악가로는 처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서 공연을 펼쳐 화제가 되었던 조용필은 2003년까지 5년 동안 매년 전회 매진 기록을 세워왔다. 2002 일본 요코하마 세계여행박람회에 참석한 2,239명의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97%인 2천172명이 부산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가수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떠올렸다.

지난 8월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4만5,000석을 매진시킨 그의 '히스토리'공연은 한국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업이었다.

올해 10월 20일 고 배호, 황병기 등 37명과 함께 문화의 날 기념식에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자신의 노래만으로 뮤지컬을 꿈꾸고 있는 조용필이 살아 꿈틀거리는 한국 대중 음악의 신화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3-12-04 16:45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