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위기 카드업계 자구책…서민들에 직격탄, 신용불량자 전락위기

신용불량자 경계에 선 100만명 "악"
경영위기 카드업계 자구책…서민들에 직격탄, 신용불량자 전락위기

“고객이 원하는 만큼 모두 준다.” 한때 국내 신용카드사들의 영업 모토였다. 대학생이건 실직자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면 무조건 붙잡아 놓고 경품으로 유혹하며 신용카드 발급을 종용했고, 휴면 회원들에게는 각종 인센티브를 부여하며 카드 재사용을 권유했다. 빚 갚을 능력과 무관하게 본인이 원하는 만큼 사용 한도가 부여됐다. 선심을 마다할 고객은 없었다.

카드 한도는 곧 자신의 돈이었다. 한도를 모두 채워 쓰고 모자라면 더 늘려 달라고 조르면 되고, 그도 안되면 다른 카드를 통해 돌려 막기를 하면 됐다. 그야말로 카드 천국이었다.

하지만 1년 여 전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언제까지나 확장일로를 걸을 것 같던 카드 업계는 불황의 직격탄을 맞았다. 올 초 업계를 공포로 몰아 넣었던 카드채 위기에 이어 최근 LG카드의 유동성 위기까지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무작정 늘렸던 카드 한도는 고스란히 연체가 돼서 돌아왔고, 이는 카드사 경영을 짓눌렀다.

그렇게 후하던 카드사들의 인심도 하루 아침에 야박해졌다. “카드 하나 만들어 달라”는 호소는 “더 이상 카드 발급이 안 된다”는 도도함으로 바뀌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고객들의 사용 한도를 축소해 나가기 시작했다.

카드사들이 주는 한도를 넙죽 받아 사용했던 서민들은 이제 좌불안석이다.

신규 카드 발급의 길은 막혔고, 모든 카드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한도 축소에 나서면서 돌려 막기조차 원천 봉쇄됐다. 업계는 한도 축소에 따라 조만간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수 있는 인원이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언제 신용불량자로 추락할 지 모를 경계선에 선 100만명의 서민들은 초조하게 정부와 카드사들의 선처만을 애타게 바라고 있을 뿐이다.


'한도 0원'은 서민들에겐 사형 선고

‘800만원 →340만원 →70만원.’ 자영업을 하는 이모(37ㆍ서울 강북구 수유동)씨는 올 들어 A카드의 월 사용 총한도가 두 번이나 대폭 줄었다. 연초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더니 최근 LG카드 사태가 터지면서 당초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현금서비스 한도도 덩달아 낮아진 것은 물론이었다.

당초 360만원이었던 현금서비스 한도는 160만원에서 이번에는 20만원으로 추락했다. 한도를 꽉 채워 사용하고 있던 이씨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일. 차액인 140만원을 당장 갚지 않으면 연체자로 낙인이 찍힐 처지다.

“제가 남들처럼 돌려 막기를 자주한 것도 아니고, 단 1초도 연체를 한 적이 없는데 고객의 동의 없이 사용 한도를 갑자기 대폭 줄이는 것이 말이 됩니까?” 무작정 한도를 늘려 대출을 유도하고서 대출을 받은 후 한도를 계속 줄이면 도대체 어떻게 상환을 할 수 있느냐는 하소연이었다.

이씨는 “그래도 한도가 400만원 이상 줄어든 올 초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라며 “이제 더 이상 카드를 사용하기 싫다”고 했다.

한도 축소를 견디지 못하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이들도 벌써부터 속속 생겨나고 있다. 4~5개의 카드를 통해 1,400만원의 대출금을 간신히 돌려 막아 온 강모(30ㆍ여ㆍ서울 강동구 천호동)씨는 최근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고 말았다. 불과 몇 개월 새 현금서비스 한도가 20~30% 수준으로 줄어든 데다 한 카드는 아예 ‘한도 0원’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때문이었다.

몇 개월 전부터는 사설 대금업체로부터 돈을 빌려 메우기도 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빚의 늪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 신용불량자를 자처한 것이다. “처음엔 대금업체 빚을 얻는 등 발버둥을 쳐서라도 신용불량자가 되는 것은 막아보려고 했어요. 헌데 여기서 200만원, 저기서 100만원 등등 계속해서 한도가 줄어들면서 더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어졌습니다.”


돌려 막기 고객, 한도 축소 1순위

9월 말 전업 카드사의 현금 서비스 한도 총액은 58조9,000억원. 지난해 말 101조원에서 9개월 사이 41.7%(42조1,000억원)가 감소했다.

실제 서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박탈감은 이보다 훨씬 심하다. 현금 서비스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 우량 고객들은 한도가 거의 변하지 않은 반면, 현금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는 서민일수록 감소 폭이 컸기 때문이다. 이는 위험 집단으로 꼽히는 10대의 경우 3월말 현금서비스 한도가 3조3,928억원에서 9월말에는 불과 21억원으로 사실상 한도가 폐지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카드사들이 한도 축소 대상 1순위로 삼는 고객은 여러 카드사에서 현금 서비스를 받고 있는 돌려 막기 고객이다. 이들 중 특히 연체 경험이 있는 고객에 대해서는 현금서비스 이용은 물론 신용 구매까지도 할 수 없도록 총한도를 ‘0원’으로 만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금서비스를 이용한 전력이 있는 고객들은 대부분 한도 축소 대상에 포함된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월 현금 서비스액을 초과하는 잔여 한도는 대부분 취소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한도가 500만원인 고객이 통상 월 200만원의 대출을 이용해 왔다면 한도를 200만원으로 줄이는 식이다. 능력을 벗어난 대출로 돌려 막기를 할 수 있는 싹을 애초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이에 따라 아직 통계가 잡히지는 않지만 LG카드 유동성 위기가 불거진 4분기에는 한도 축소액이 더욱 커졌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 특히 일부 카드사는 LG카드에서 현금 서비스를 받고 있는 고객에 대해서는 무조건 한도를 축소하기도 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물 만난 사채 시장

카드사 대출 길이 막히면서 최근 신용협동조합, 저축은행 등은 때 아닌 호황이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3분기 가계신용 동향’에 따르면 9월말 현재 가계 빚 잔액은 439조9,481억원으로 6월말에 비해 8,613억원이 증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카드 대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가계 빚이 늘어난 가장 큰 원인은 신용협동기구의 대출이 5조원 가량 급증했기 때문. 신협과 저축은행 등이 은행이나 카드 대출을 받기 어려운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 틈새 시장 공세에 적극 나선 결과였다.

사설 대금 업체들도 ‘물 만난 고기’ 마냥 기승을 부리고 있다. ‘카드 한도 축소, 이젠 걱정 마십시오.’ ‘카드 대출, 저렴한 할부 대출로 해결 하세요.’ ‘돌려 막기가 힘드세요? 단 1분 만에 해결해 드립니다.’ …. 최근 대금 업체 광고는 철저히 카드사에서 퇴출 위기에 내몰린 고객들을 겨냥하고 있다. 신용불량자 추락의 기로에 선 서민들이 100만명에 달한다니 대금 업체들로선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대금 업체로 서민들의 발길이 몰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대출 자체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서울 강남의 사설 대금업체 D파이낸스 관계자는 “최근 대출을 원하는 고객들의 경우 과거에 비해서 리스크가 훨씬 큰 것이 사실”이라며 “일정한 수입이 있어 상환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고객을 엄선해 대출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등록 대금 업체에서마저 외면당한 고객들은 결국 불법 사채 시장을 찾아야 한다. 이들의 대출 금리는 연 100%가 넘는 가히 살인적인 수준. 대출 원금이 두 배로 늘어나는데 불과 1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원금 상환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폭력 추심에 시달리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카드 한도 축소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등록 대금업체, 불법 사채시장을 거쳐 결국엔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파산을 하는 수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책임은 소비자만 진다?

금융 당국은 카드사의 급격한 이용 한도 축소가 신용불량자 양산의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최근 분기별로 10%씩 단계별로 한도를 축소할 것을 카드사 측에 권고했다. 카드사 부실을 막기 위해 한도 축소가 불가피하다고는 해도 급격한 변화에 따른 충격은 완화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카드 업계는 이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현금서비스 비중을 전체 취급액의 50%로 낮추라고 종용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한도 축소에 제동을 거느냐는 것이다. 한 카드사 임원은 “현금서비스 취급을 많이 하면 많이 한다고 책임을 묻고, 억제하면 너무 급격하다고 문제를 삼는다”며 “카드사가 완전히 동네 북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고 하소연했다.

반면 소비자들은 단계별 한도 축소 정책이 실효성이 없다고 몰아 세운다.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에는 “이미 카드 사용 한도가 대폭 줄어든 뒤에 이제 와서 한도 축소를 점진적으로 하라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에 다름없다”며 정부가 직접 나서서 한도를 복원시켜 줘야 한다는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애매모호하다. 금감원 김진수 여전감독1팀장은 “단계적 한도 축소 역시 단순히 권고 차원이기 때문에 이행을 하지 않았다고 제재를 할 수는 없는 사안”이라며 “카드사 상황이 어려운데 한도를 복원하라고 요구하기는 더욱 힘들다”고 말했다.

급격한 한도 축소에 따른 부작용은 신용카드 사용을 독려한 정부, 무분별하게 한도를 늘려준 카드사, 그리고 능력 이상으로 카드를 사용한 고객 등 3자가 동시에 합작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책임은 고스란히 고객들에게만 떠넘겨질 상황에 처했다.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내년 초 신용불량자가 500만명에 육박할 수 있다는 경고는 단순한 엄포가 아닌 듯하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2-10 13:31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