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수위 넘어선 텔레마케팅사기성 전화판촉 극성에 노이로제,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산

스팸 폰 공해, 말려들면 '봉' 된다
위험수위 넘어선 텔레마케팅
사기성 전화판촉 극성에 노이로제,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산


“당첨 되셨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다. 무작위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통화 대상으로 선택을 받은 것은 분명하니까. 기분은 썩 유쾌할 리 없다. ‘당첨’에 따른 혜택이 전혀 없는 탓이다. 아니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사기를 당할 수도 있다. 조금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이번에는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호기심 차원에서 그저 들어 볼 뿐이다.


음흉한 신용 조회, 방심하다 물린다

강원 평창과 경기 청평에 리조트 개장을 앞두고 있는 S사는 요즘 전국 12개 지점을 통해 텔레마케팅 영업이 한창이다. 헌데 엉뚱하게도 이 회사의 텔레마케팅 상품은 리조트 회원권이 아니라 ‘기프트 카드’다.

“축하합니다. 당첨 되셨습니다. 저희가 리조트 개장을 기념해 기프트 카드를 발급하게 됐습니다. 당첨되신 4,000명에 한해서 카드를 발급해 드립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판촉원의 설명이 시작된다. 이 회사가 발급하고 있는 기프트 카드는 예를 들어 30만원 짜리 카드를 20% 할인된 24만원에 구매한 뒤 주유소나 음식점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선불 카드다.

고객이 카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순간 ‘작업’이 시작된다.

“신용이 정상인 분에게만 카드를 발급해 드릴 수 있어요. 주로 사용하시는 카드가 어느 회사 것이죠? 앞자리 4숫자는 어떻게 되나요?” 여기까지야 별 지장이 없겠다 싶어 알려주면 아주 자연스럽게 나머지 뒷자리 카드 번호까지 요구한다. 즉석에서 신용 조회를 해주겠다는 것이다.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자신의 신용카드 번호를 통째로 줄줄이 읊어주기 십상이다.

도대체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는 몰라도 무언가 ‘음흉한 의도’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개인의 신용과는 전혀 무관한 선불 카드 발급에 신용카드 번호를 요구할 리 만무하다.

S사 본사측은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잡아 뗀다. 기프트 카드는 리조트 연간 회원에게만 주는 특전일 뿐,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판매를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허나 꼬치꼬치 따져 묻자 한 발 물러선다.

“전화 판촉 영업은 외주를 준 것인데 과잉 영업 의욕에서 나온 실수였던 것 같다. 해당자를 문책하는 등 엄중 조치하겠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말 뿐, 각 지사를 통한 기프트 카드 판매 영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스팸 폰'에 노이로제 걸린 사회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인터넷 스팸 메일이 사회 문제가 된 데 이어 최근에는 텔레마케팅 공세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말하자면 ‘스팸 폰’(Spam Phone)이다. 보고싶지 않다면 그냥 지워버리면 되는 스팸 메일과 달리 텔레마케팅은 일단 전화를 받는 순간 쉽게 유혹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해악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전화 판촉 사기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수법이 점차 다양해지고 폐해가 갈수록 늘고있다는 데 있다. 회사 내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인바운드(In-bound) 영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고객을 발굴해 나서는 아웃바운드(Out-bound) 영업이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업체들의 전화 판촉 경쟁도 더욱 혼탁해지고 있는 탓이다.

고객들로서는 하루에 많게는 서너 차례씩 걸려오는 ‘스팸 폰’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그래도 세상 물정에 밝은 직장인들은 그나마 나은 편.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의 경우 길거리 약장수에게 속아 넘어가듯 판촉원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만다. 그들이 판촉원들의 집중 표적이기도 하다.


점점 다양해지는 전화 판촉 유형

“H전자에서 차량 GPS(위성항법장치) 상품을 새로 출시했는데요. 선정되신 500분에 한해서 무료로 증정하는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텔레마케팅의 대표적인 수법이다. 상품 무료 제공. 한참의 홍보 끝에 역시 단서가 붙는다. 위성을 통해 GPS를 수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성 자체 관리비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단다. “월 1만8,500원씩 2년간 납부하시면 되요. 그 이후부터는 위성 관리비 조차도 무료로 해 드립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GPS는 제품만 구입하면 월 이용료를 별도로 지급하지 않는 상품이다. 결과적으로 제품 구입비 44만4,000원을 2년 할부로 판매하겠다는 것이다. 허위 홍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엄밀히 따지면 H전자의 제품도 아니다. O사가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만들어 내는 제품이다. H전자 본사에서는 “OEM 방식의 제조ㆍ판매가 이뤄지기 때문에 현장 영업에 대해 일일이 본사에서 확인할 수가 없다”고 말할 뿐이다.

홈쇼핑이라며 전화 상품 판매에 나서는 곳도 최근 급격히 늘고 있다. 개별 업체의 이름으로 판매에 나서는 것보다 고객들을 유혹하기가 훨씬 쉽다는 판단 때문이다.

강원도 W홈쇼핑이라는 곳은 시가 59만4,000원 짜리라는 장뇌삼 엑기스를 역시 ‘무료’로 판매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제품 출시 기념 사은 행사라는 명목이다. 이 상품에 붙는 단서는 제세 공과금. 경품에 당첨됐기 때문에 이 소득에 대한 세금과 공과금 22%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세금 중 일부도 회사측이 부담해 고객은 실제 7만9,000원만 부담하면 된다는 것. 실제 상품 가격을 경품 소득에 대한 제세 공과금으로 교묘히 둔갑시키는 상술이다.

허위나 과장 홍보는 아니지만 끈질기게 고객을 물고 늘어지는 텔레마케팅 형태도 기승을 부린다. 주로 외국 잡지 판매 대행사들이 애용하는 방식이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제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신입 사원으로 취직을 해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요. 선배님께서 끝까지 들어주시지 않으면 제가 혼이 나거든요.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셔서 꼭 들어주세요.” 무슨 신입 사원이 그리도 많은지 매번 같은 멘트다. 고객이 뭐라고 하든 대꾸조차 않는다. 그저 종이 위에 적힌 멘트를 숨 한번 제대로 쉬지 않고 줄줄 읽어내려 갈 뿐이다. 무례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만약 너무 애처로워 보여 응대를 하기 시작하면 최소 10분 이상은 허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끝까지 듣고 잡지 구독을 거절한다는 것도 웬만큼 매정하지 않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걸 노린 판매 수법이다.


텔레마케팅과의 전쟁에 나서라

텔레마케팅 공세는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선진국일수록 더 거세다. 자본주의의 첨병이라는 미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 문제가 돼 왔다.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은 미국이 전화판촉 규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10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텔레마케팅 수신거부 명부제(Do-Not-Call-List).

판촉 전화가 사생활 침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자 소비자들이 자신의 집 전화 번호를 거부 명부에 등록하면 정당, 자선 단체 등 비영리 단체를 제외한 기업들의 마케팅 전화를 5년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만약 거부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판촉을 할 경우 건당 최고 1만1,000달러(1,300만원)의 벌금을 물도록 하고 있다.

법원이 표현의 자유에 침해된다고 제동을 걸었고, 텔레마케터 업체들은 2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며 반발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대중은 원치 않는 전화, 원치 않는 침입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다”고 일축했다. 그만큼 텔레마케팅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아직 우리나라는 실제 피해자가 발생하기 전까지 전화 판촉에 대한 단속은 거의 이뤄지고 있지 않다. 텔레마케팅으로 회원을 모아 회비 133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D사 황모씨가 구속되고, 무료 해외 여행에 당첨됐다며 240억원을 횡령한 T사 이모씨가 구속되고….

사후약방문 격 사기 적발 뉴스가 끊이질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전화 판촉 영업이 계속 확산될 수밖에 없는 만큼 엄격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텔레마케팅과의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YMCA 시민중계실 서영경 팀장은 “당장은 터무니없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거나 회사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는 경우 소비자들이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정부 역시 신용카드사 등의 협조를 얻어 판매 목적을 숨기는 변칙 판매에 대해 적극 단속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2-10 14:48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