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 화교자본 앞세운 중국, 첨단기술의 기업사냥 본격화란싱그룹 쌍용차 우선 협상대상자 선정, '위협의 땅' 현실로

대륙의 자본이 한국을 넘본다
막강 화교자본 앞세운 중국, 첨단기술의 기업사냥 본격화
란싱그룹 쌍용차 우선 협상대상자 선정, '위협의 땅' 현실로


외국 사냥꾼들의 표적이기만 했던 중국이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토종 기업들은 선진 기업을 삼키겠다고 야단이다. 여기엔 국내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도 중국은 농산물이나 피혁, 전자제품 등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경쟁력을 보여왔다. 질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저가 공세를 펼 수 있었던 덕이었다.

지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고도 성장 과정에서 축적된 화교 자본을 무기로, 첨단 기술의 기업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중국 정부도 토종 기업들의 이런 해외 기업 사냥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우리나라와 중국 기업 간의 핵심 산업 기술 격차는 기껏해야 5년 정도다. 만약 이대로 국내 핵심 기업이 중국에 계속 흡수될 경우, 노동집약적 산업 뿐 아니라 첨단 산업에서도 중국에 추월을 당하는 시기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올 수 있다. ‘기회의 땅’ 중국이 언젠가 ‘위협의 땅’이 될 것이라던 우려는 벌써 현실화하고 있다.


쌍용차 중국 기업으로 변신하나

쌍용자동차 매각 과정에서 입찰제안서를 제출한 곳은 5~6곳에 달했다. GM, 르노, 란싱(藍星), 상하이기차공업집단공사(SAIC) 등. 세계적인 완성차 업체와 중국 기업들의 대결 구도는 업계 관계자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자금력에서 보나 인지도 면에서 보나 무게 추는 GM 혹은 르노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총자산 3조원(200여억 위안) 정도인 중국 란싱그룹이 입찰 기업 중 가장 높은 인수 대금인 6,500억원을 적어내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것은 다소 의외였다. 채권단 한 관계자는 “다른 어떤 입찰자들과 비교해 봤을 때도 란싱 그룹의 인수 의지가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군수용 지프를 생산하고 있는 란싱그룹이 쌍용차 인수에 나선 것은 최근 수요가 급증하는 민간용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고급차 개발을 위해 쌍용차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 떡(수익 창출)보다는 고물(기술 이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선진국 인수 희망 업체들은 전제 조건으로 감원이나 경영진 교체를 제시하지만, 중국 기업은 경영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경영진 유지와 고용 보장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노조 등과의 잡음을 피하려는 채권단과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셈이다.

국내 업체인 현대ㆍ기아차는 대우차와 삼성차를 삼킨 GM이나 르노 중 한 곳이 쌍용차를 인수하는 것에 경계심을 보여온 터여서 란싱그룹이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것에 대해 내심 안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놓을 만한 일은 아니다. 자동차는 다양한 첨단 기술이 융합돼 ‘학습 효과’가 큰 대표적인 산업이다.

세계에서 가장 급속하게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고 잇는 중국에 첨단 기술이 이전될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더 큰 부메랑이 돼서 돌아올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즈는 최근호에서 “란싱그룹의 쌍용차 인수가 확정될 경우 전자, 조선, 자동차 등 한국 주요 산업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기술이 중국으로 이전되는 데 대한 우려가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잇따르는 중국의 한국 기업 M&A 시도

한국의 첨단 기술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2001년 국내 채권단의 하이닉스 공장 매각 작업 때 처음 표출됐다. 중국 베이징의 수강그룹과 항저우의 컨소시엄은 당시 하이닉스 생산 라인에 대해 실사까지 마쳤지만 매각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호시탐탐 한국 첨단기업을 노리던 중국의 야심은 올 1월 현실화했다. 하이닉스의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부문이 분사한 하이닉스를 중국 BOE그룹이 3억8,000만달러에 인수한 것이었다. 이는 중국 제조업체가 한국에 직접 투자한 것 중 최대 규모. 디스플레이 전문 업체인 BOE는 TFT-LCD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최근 매출과 순이익이 큰 폭으로 증가하는 등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누리고 있다.

법정관리 중인 옛 대우 계열사 오리온전기의 자회사 오리온PDP에 대한 중국 기업의 입질도 계속되고 있다. 오리온전기측은 “중국의 2~3곳 전자 업체가 관심을 보여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오리온PDP는 올 초 세계 최대의 84인치 PDP 모니터 ‘네오다임’을 개발하는 등 녹록치 않은 기술력을 보유한 업체.

PDP 기술 수준이 떨어지는 중국 기업으로서는 단시간에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한국전자산업진흥회 관계자는 “중국이 오리온PDP를 사들일 경우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대표하는 첨단 산업인 LCD, PDP 기술을 모두 확보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하이테크 가전 제품 분야에서도 중국의 대(對) 한국 공세는 이미 시작됐다. 그간 저가 전자제품의 경우 원산지가 ‘차이나’인 경우가 많았지만, 중고급형이나 하이테크 가전ㆍ정보기기의 경우에는 중국산에 대한 낮은 신뢰 등이 자연스럽게 방어막이 돼 왔다.

하지만 중국 최대 가전 업체이자 지난해 11조원에 달하는 매출로 백색 가전 부문 세계 5위에 오른 하이얼(海爾)이 최근 무서운 기세로 한국 시장을 파고 들고 있다. 9월 고가의 와인 냉장고 등을 국내에 들여온 데 이어 내년 2월부터는 200~500리터급 중소형 일반 냉장고 4~6개 모델을 출시할 계획이어서 국내 가전 업체와 한 판 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중국 공세는 이제부터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은 ‘쩌우추취(走出去ㆍ해외로 나가자)’ 를 부르짖으며 토종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독려했다. ‘세가지 3분의 1’이라는 슬로건도 등장했다. 3분의 1은 국내에서 생산해 국내에서 팔고, 3분의 1은 국내에서 생산해 해외에 팔고, 나머지 3분의 1은 해외에서 생산해 해외에서 판다는 전략이다.

상하이 시정부도 팔을 걷고 나섰다. “경영자는 계약서에 서명만 하면 된다”는 것이 시정부의 홍보 전략이다. 공업대외교류센터를 통해 외국 전문기관과 제휴를 맺고 해외 인수ㆍ합병(M&A) 대상 기업을 선정해 기업들에게 추천하는 한편, 대형 M&A 거래를 위해 기업들의 외환 보유액 허용 기준도 6억 달러로 대폭 늘렸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자국 기업의 해외 기업 매수를 적극 지원하는 것은 해외 선진 기업들의 기술과 노하우를 얻어 보겠다는 취지다. 넓은 국토, 저렴한 인건비 등을 무기로 해외 직접 투자를 중국 땅에 유치해 양적인 면에서 성장을 이루긴 했지만, 기술 수준이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중국산은 싸구려 브랜드라는 인식이 쉽게 깨지지 않은 탓이다.

중국으로 밀려 드는 자금을 주체할 수 없는 것도 한 요인이다. 중국은 지난해 계약액 기준으로 827억달러의 자금이 투자돼 세계 최대 외국인 직접투자(FDI) 유입국이 됐다. “대규모 무역 수지 흑자로 위안화 평가 절상 압력에 직면한 상황에서 최근 급증세를 보이고 있는 외환 보유액을 어떻게든 줄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LG경제연구원 강승호 책임연구원의 설명이다.

지난해 중국 기업의 총 해외 투자 규모는 29억 달러로 아직 FDI의 0.4%에 불과하지만 증가세는 가파르다. 독일의 컨설팅업체인 롤랜드버거는 최근 중국 제조업체 중 4분의 3 가량이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한국 기업을 노리는 중국 기업들의 공세가 이제부터 본격화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해외 투자에 대한 중국 기업의 노하우 및 전문성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아직까지는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 기업들의 관심이 떨어지는 한 단계 수준이 낮은 기업들이 M&A 대상이기 때문에 지나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중화권에서 발행되는 아주주간(亞洲週刊)에 따르면 지난해 아시아 기업들의 순위를 매긴 결과, 순이익 상위 40대 기업에 포함된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 등 6개에 불과했지만 중국은 무려 8개에 달했다. 중국 기업들은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을 뒤엎는 결과였다. 한국 기업들이 그들의 공세를 무방비로 맞을 경우, 금세 설 자리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팽배하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2-23 16:59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