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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 대법정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용인 이씨 사맹공파 여성 5명 '종중회원 확인 청구'소송
사상 첫 대법정 공개 재판, '열린 사법부' '관습의 변화' 확인 의미




△ 용인 이씨 사맹공파의 출가한 딸들이 제기한 종중 땅 불평등 반발 소송에 대한 대법원 첫 공개 변론에서 최종영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낭독하고 있다. 손용석 기자



12월18일 오후 2시. 사법부 권위의 상징인 대법원 대법정을 방청객들이 가득 메웠다. 사법 사상 최초로 대법정에서 공개 재판이 열리는 자리였다.

첫 공개 재판에 오른 사건은 이른바 ‘딸들의 반란’ 소송. 용인 이씨 사맹공파 33세손으로 출가한 여성 5명이 종중을 상대로 낸 ‘종중회원 확인 청구 소송’이다. 이들은 2000년 4월 “출가 여성에게 종중 구성원이 아니라며 재산을 차등 분배한 것은 남녀 차별”이라며 소송을 냈지만 1, 2심에서 모두 기존 대법원 판례를 이유로 패소했다.

사전 인터넷 신청 등을 통해 어렵사리 이 희귀한 자리에 초대받은 방청객은 50여명의 취재진을 제외할 경우 대체로 두 부류였다. 여성들이거나 혹은 나이가 지긋한 남성이거나. 각각 원고와 피고측 지지로 확연히 구분되는 이들이었다. 통상 사건과 직접 연관이 되는 증인이 재판에 참석하는 것과 달리 전문가적인 식견을 밝히기 위해 참고인들이 재판에 참여한 것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최종영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 입장과 함께 시작된 3시간에 가까운 공방은 사실 재판이라기 보다는 TV 시사 토론을 그대로 법정에 옮겨놓은 듯했다. 혹은 배심원을 앞에 두고 열띤 공방을 벌이는 미국 법정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보수적인 사법부에서 분명 의미 있는 새로운 실험이었다.


관습이 먼저냐, 제도가 먼저냐



원ㆍ피고 측에게 주어진 시간은 변론 15분과 질의 답변 15분 등 각 30분. 먼저 변론권을 얻은 원고측 대리인 황덕남 변호사는 시종일관 차분한 말투로 “왜 여성도 종중원이 돼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출산율 저하로 아들이 없는 집안이 늘어나고 점차 전통 제례를 이행하지 않는 곳 역시 급증하고 있습니다. 종중의 가장 큰 역할이 분묘와 제사에서 친목 도모로 변한 현실에서 출가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성평등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지원 사격에 나선 김덕현 변호사도 “서구 역사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기까지의 긴 과정을 기억해 보라”며 “지금은 아무도 여성 참정권에 이의를 달지 않는 것처럼 여성의 종중원 인정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고측은 전통을 중시한다는 안동 지방 40개 종중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9개 종중이 여성의 참가 자격을 인정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제시했다.

하지만 피고측은 “아직 관습은 변하지 않았다”고 맞섰다. 민경식 변호사는 “장차 아들이 없어 종중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또 조상이나 제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시대가 올 수 있지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라며 “모든 사람의 생각이 바뀌기도 전에 인위적으로 제도부터 바꾸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명절이 되면 전국 고속도로가 꽉 막히는 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분묘와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아무리 사회가 변해도 가능한 천천히 바뀌어야 할 것이 있고, 바뀌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며 전통과 관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설전, 또 설전



양측은 서로의 주장에 논리적 허점을 물고 늘어지는 등 집요한 공세를 폈다. 피고측은 출가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할 경우 숱한 모순을 낳게 된다며 원고측을 몰아 세웠다.

△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용인 이씨 사맹공파의 출가한 딸들이 제기한 종중 땅 불평등 베분 반발 소송에 대한 대법원 첫 공개 변론이 열리고 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OO 양씨와 XX 이씨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 난 아이는 OO 양씨 종중원인 동시에 XX 이씨 종중원이기도 합니다. 이 뿐입니까. 할머니, 나아가 증조 할머니의 종중에도 자격을 인정받게 됩니다.” 민 변호사는 “한 사람이 수십 곳의 종중원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고 공세를 폈다.

이에 황 변호사는 “아직까지 사회에 만연한 부계 혈족주의까지 송두리째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며 “현재의 사회 인식을 반영해 출가 여성까지만 종중원으로 인정하자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반면 원고측은 종중과 종회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피고측을 공격했다. 종중은 공동 선조의 후손들로 구성되는 자연발생적 집단체인 반면, 의사 결정권을 지닌 종회는 적극적인 활동 의사를 가진 이들로 구성된다는 것.

변호사는 “따라서 활동 의사에 따라 가입이 결정되는 종회와 달리 종중의 경우 공동 선조의 후손들이라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구성원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측 이진강 변호사는 “종중의 목적이 분묘와 제사에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며 “제사를 모시지도 않는 출가 여성을 종중원으로 인정하자는 것은 의무는 이행하지 않고 권리만 행사하겠다는 것”이라고 맞섰다.


대법관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



“집안 제사에 참여하려는 열성이 있는 여성이라도 종중원이 될 수 없는 반면, 그럴 의사가 없는 남성은 자동으로 중중원이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지담 대법관) “피고 종중 규약이 ‘회원의 자격으로 용인 이씨 사맹공의 후손으로서 성년이 되면 회원의 자격을 가진다’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인데 왜 남성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습니까.” (고현철 대법관)

3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사법 체계에서 대법원의 상고심 재판은 사실 관계를 다투는 사실심이 아니라 법률 문제만을 심리하는 법률심이다. 법정 밖에서 대법관들이 서류 심리로 합의를 이뤄내고 법정에서는 선고만 이뤄져 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살아 숨쉬는 재판이었다. “국민 생활에 미칠 영향이 큰 사안”이라는 판단으로 규칙을 새로 제정해가면서까지 대법원이 공개 재판 제도를 도입한 터였다. 그간 법정에서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대법관들은 사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양 당사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원ㆍ피고측은 허를 찌르는 대법관들의 질문에 답변을 준비하지 못해 곤욕을 겪기도 했다.

참고인들의 진술도 한치의 양보가 없었다. 피고측 이승관 성균관 전례연구위원장은 “출가 여성은 시댁에서 종중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며 친가의 종중원이 될 수 없다”며 전통의 잣대를 들이 밀었고, 원고측 참고인인 이덕승 안동대 법대 교수는 “딸만 낳는 가정도 적지 않고 종중 일에 무관심해지는 추세 속에서 오히려 여성을 종중에 참석시켜야 한다”고 법의 변화를 촉구했다.


최후의 승자는 누구?



“종중의 역할은 성인 남성이 맡고 있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묘소를 관리하는 일이므로 여자나 다른 집안에 출가한 자, 그 자손은 종중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여성 참여를 보장한 종중 규약은 본질에 반한다.”

이런 대법원 판례가 만들어진 것은 1992년,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이었다. 그간 여성의 지위는 놀랄 만큼 신장했다. 사회 활동 참여율이 눈부시게 높아졌고, 재산 분할 비율 등 법적인 지위도 남성과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 섰다. 이 사건의 의미를 높게 평가해 대법원이 공개 변론을 열기로 한 것부터가 의미심장한 변화였다.

대법원은 이날 공개 변론 내용을 토대로 대법관들의 합의를 통해 조만간 이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릴 예정. 결과를 미리 예측한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결론이 내려지든 이번 공개 변론이 더 이상 여성이 넘볼 수 없는 성역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줬다는 점이다.

변론 과정에서 피고측도 인정을 했듯, 설사 원고측이 패소한다 해도 이는 아직은 관습이 변화하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 영원히 여성이 종중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그간 사회와 연결하는 문을 차단해 왔던 사법부가 앞으로도 사회와 열린 소통을 계속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은 더더욱 큰 성과로 평가받을 것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3-12-2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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