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립 미술관- 프랑스 국립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피카소·마티스·샤갈·브라크 등 미술거장 80여작품'현대적 낙원' 해석

단조롭고 지루한, 때로는 고통으로 숨이 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풍요와 쾌락의 낙원, 아르카디아(Arcadia)는 어디에 있을까. 서울시립미술관의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은 우리에게 아르카디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관람자는 아르카디아로 들어가기 위해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의 <아르카디아와 목자들(Les Bergers d'Arcadia)>의 영상이 투사되고 있는 발을 통과해야 한다. 낙원에 대한 설레임으로 발을 걷으며 들어서는 순간 곧바로 아르카디아는 환상임을 깨닫는다.

프랑수아-자비에 라란(François-Xavier Lalane)의 24마리의 양떼는 끔찍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24마리 중 14마리 양이 머리가 잘린 채로 서성거리고 있다.

양들은 비옥한 푸른 풀밭 위에 있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생존의 치열한 투쟁에서 머리가 잘린 것이 아닐까. 이것이 첫 번째로 만난 아르카디아의 모습이다. 축복과 풍요의 땅, 아르카디아는 어디에 있는가?

이 전시를 기획한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의 디디에 오탱제(Didier Ottinger) 수석 학예연구관은 10개의 소주제를 선택해서 아르카디아가 풍요와 쾌락이 충만한 낙원이지만 죽음과 허무 역시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서양미술가들은 수 백 년 동안 아르카디아를 찾아 나섰다.

아르카디아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꿈인 것 같지만 어쩌면 언젠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만드는 설레임이다. 푸생의 후예들, 현대 미술가들은 아르카디아를 막연히 찾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낙원의 건설이라는 이상과 욕망을 회화에 투영했다.

이 전시에서 소개되고 있는 보나르(Pierre Bonnard), 마티스(Henri Matisse), 브라크(Georges Braque), 피카소(Pablo Picasso), 레제(Fernand Leger), 피카비아(Francis Picabia) 등의 80여점의 작품은 그들이 꿈꾸었던 아르카디아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미술가들은 에로틱한 관능과 쾌락, 따스한 햇빛이 반짝거리는 자연, 시간에 따른 죽음과 허무, 여유로운 노동자들의 피크닉, 새로운 예술의 조형성 등을 탐구하면서 아르카디아를 꿈꾸었다.

20세기 초 야수주의자들에게 아르카디아의 풍요, 쾌락, 기쁨, 행복은 지중해 연안의 작열하는 햇빛과 결부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삶의 행복>을 그리며 회화의 낙원을 탐색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에서 소개되고 있는 마티스의 <붉은 실내>, <목련이 있는 정물>은 마티스가 젊은 시절 지중해 연안에서 훔쳤던 태양을 먹은 붉은 색채로 타오르고 있다.

화면 전체에 넘쳐흐르는 눈부신 붉은 색채는 건강, 풍요, 쾌락, 행복이 가득 찬 낙원을 가리킨다. 자연 그 자체가 아르카디아가 아닐까. 보나르의 화실에서 바라보는 자연풍경은 삶의 풍요, 안락, 따스함이 넘실거리는 낙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여기에도 죽음, 그리움이 존재한다. 푸생의 목자들이 두개골을 그리며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듯이 보나르 역시 죽은 아내로 짐작되는 여인을 화면 왼쪽 아래에 그려 넣고 있다.

단지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고통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흰색, 황토색, 분홍색, 연보라색 등이 감미로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따사로운 풍경 속에서도 그리움의 고통이 있는 것이다.

6- 페르낭 레제, <여가-루이 다비드에게 표하는 경의> 1948~49
7- 마르크 샤갈 <무지개> 1967
8- 앙리 마티스 <붉은색 실내> 1948

지우제페 페노네(Giuseppe Penone)의 설치 작품 ‘되찾은 낙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초록에서 노랗게 변해 가는 월계수 잎을 통해 낙원에도 늙음, 죽음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잎은 언젠가는 말라 부스러기, 한 줌의 먼지가 될 것이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38년부터 1944년 동안 화가들은 인간이 저지르는 참혹한 비극을 체험했다. 그토록 꿈꾸었던 아르카디아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울부짖음이 진동하는 절망의 땅이 되었다. 절망은 죽음과 연결이 되고 죽음은 허무와 동반자가 되기 마련이다. 허무는 언제나 종교를 찾는다.

브라크는 두개골과 묵주, 십자가가 있는 정물을 <바니타스>(1938~1943)라 명명했다. 바니타스는 헛되고 헛된 삶의 허무를 의미한다. 브라크는 젊은 날, 피카소와 더불어 미술의 조형적인 혁명인 입체주의를 외치며 20세기 벽두를 열정으로 강타했다.

그러나 중년을 훌쩍 넘기면서 조용히 생을 관조하며 죽음을 사색하고 종교를 통한 평화를 꿈꾸고 있다. 평화만큼 더 좋은 낙원이 있을까.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은 평온하고 즐겁게 지내는 평범한 하루일런지 모른다.

본 전시는 평범한 중산층의 사람들이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기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를 마지막 테마로 소개하고 있다. 누드의 여인과 두 남자가 화창한 자연 속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자연에 목말라하는 도시인의 목가적 열망과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여유와 풍요를 상징한다.

알랭 작케(Alain Jacquet)는 마네의 그림을 현대적 기법으로 재창조하여 피크닉,<풀밭위의 식사>(1963~64)가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 모두의 갈망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유급휴가를 받고 전원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의 땅, 아르카디아의 모습일 것이다.

페르낭 레제는 <여가-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1948~1949)에서 2차 대전 이후 프랑스 정부에서 결정한 유급휴가를 받고 자전거로 전원으로 휴가를 떠난 평범한 노동자 가족의 행복을 경쾌한 색채로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하단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여자는 손에 <루이 다비드에 대한 경의(Hommage à Louis David)>라고 씌어 있는 종이를 들고 있다. 다비드는 18세기 공화주의자로서 민중의 아버지로 불리었던 인물이다.

이 종이쪽지는 노동자들의 유급 휴가가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긴긴 세월 동안 피의 투쟁을 통해 쟁취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투쟁과 노력만으로 아르카디아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성취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을 품고 그 욕망은 좌절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르카디아는 욕망으로 허덕거리는 우리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야심찬 희망, 낙관적인 의욕, 미래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것들의 동반자인 막연한 불안, 좌절, 허무가 소용돌이치는 우리 마음 안에 아르카디아가 숨어있지 않을까.

◇ 김현화 숙명여대 교수

숙명여대, 홍익대 대학원(미술사학과) 졸업. 파리1대학 미술사학 박사. 현 숙명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저서 <20세기 미술사-추상미술의 창조와 발전> <경계없는 현대미술> <성서 미술을 만나다> 등.



김현화 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