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개관 30주년 기념해 손수그린 16점작품 포함 총 75점 회화 선보여

자유로운 유랑화가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걸작들이 서울을 찾았다.

세종문화회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본관에서 내년 3월 13일까지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이 열리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대표미술관 비엔나아카데미뮤지엄의 소장품 가운데 루벤스가 손수 그린 16점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총 75점의 바로크 회화들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는 루벤스의 작품을 비롯해 안토니스 반 다이크, 야콥 이삭스존 반 루이스달 등과 같은 플랑드르 작가들의 걸출한 작품들과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아우르는 북부 네덜란드의 개혁적인 시민예술작품들도 함께 소개된다.

플랑드르의 거장 루벤스는 이탈리아의 초기 바로크 미술을 플랑드르에 전파한 문화 전령사이자 북유럽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로 통한다.

스물 셋의 나이로 이탈리아 미술계에 진출한 루벤스는 8년 동안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로마의 고대 석관과 기념물의 부조 그리고 수집가들의 정원에서 발굴된 진귀한 유물들을 조형의 교과서로 삼아 예술적 소양을 키워나간다.

고전 고대의 이상적 조형, 카라바조(Caravaggio,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가 태어난 곳이며, 그의 또 다른 애칭)의 생동감 넘치는 자연주의 그리고 카라치(Lodovico Carracci, 종교화의 대가이자 바로크회화 확립에 공헌한 이탈리아 출신 화가)의 엄숙한 고전주의는 루벤스가 수년간 현장에서 직접 체득한 소중한 결실들이다.

이는 플랑드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예술의 진정한 보고나 마찬가지다.

당시 플랑드르에는 초기 고딕 양식이 남아있었지만 루벤스는 이 시기 유행하던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빛과 색채를 강조하며, 과감하고 복잡한 화면구도와 그만의 빠른 필력으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화법을 추구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실제로 루벤스는 남부유럽 바로크 양식의 원근법을 비롯해 해부학적 측면에서 대가적인 요소를 두루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화풍에서 느껴지는 마네킹과 같은 비인간적인 느낌은 배제하고 자연스럽고 풍부한 감성을 작품에 담아내는 창조성을 선보인다.

이처럼 루벤스를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북유럽 회화의 흐름은 플랑드르 미술로 하여금 비극적 장중함의 외투를 벗고 경쾌한 싱그러움을 노래하게 하며, 근면과 성실 대신 천재성의 덕목과 영혼의 떨림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결국 플랑드르의 자유와 이탈리아의 우아미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작품을 루벤스라고 일컫는 것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세레스와 바쿠스가 없으면 비너스는 추위에 떤다'
4- 안트베르펜예수회교회 천장화 가운데 '목자들의 경배
5- '바쿠스 축제'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에서는 바로 이 같은 바로크 미술의 생명력과 웅장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루벤스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오레이티아를 납치하는 보레아스>는 신화를 주제로 한 대형작품으로 루벤스가 제자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제작한 것으로 비엔나아카데미뮤지엄을 대표하는 수작이다.

트라키아의 난폭한 북풍의 신 보레아스는 아테네 왕 에레크테우스의 딸 오레이티아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계속 거절 당하자 결국 자신의 날개 아래 오레이티아를 감춘 후 납치해간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도 중심에 놓여 있다.

인문주의자이자 고대 문헌과 예술에 정통했던 루벤스는 작품의 테마를 그리스신화에서 많이 인용했다.

특히 ‘오레이티아를 납치한 보레아스’는 루벤스 이전에 어떤 화가들도 다루지 않았던 주제였기 때문에 그 형상화에 있어서도 도상전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진주처럼 반짝이는 다채로운 색채와 웅장한 구도의 글레이즈 기법(진하고 흐린 여러 색의 색조로 표현된 화면 위를 얇게 덧칠하는 기법) 루벤스의 거장다운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아름다운 누드화도 눈에 띄는데 라파엘의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삼미신>이 그것이다. 서로 사랑스럽게 포옹하면서 주고 받고 답례하는 ‘자비’의 순환 과정을 의인화하고 있다. 라파엘의 <삼미신>과는 달리 루벤스는 여인들이 앞을 향하게 함으로써 정적인 원무(圓舞)의 모티브를 없애고 춤추는 세 여신의 동적인 모습을 강조했다.

루벤스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고혹적인 시적 정서가 담긴 작품 <파리스의 심판>은 세 여신인 주노와 미네르바, 비너스가 서로 아름다움을 겨루고, 이것이 결국 트로이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다는 내용을 표현했다. 섬세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형태나 그들이 서있는 대지와 하늘, 주변 풍경의 조화가 돋보인다. 루벤스는 예술 생애 전반에 걸쳐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신화 주제를 다루며 새로운 표현양식을 창조하고자 애썼다.

루벤스는 동물적 욕망과 조화를 이루는 감각적 쾌락에 관한 내용도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다. 에로스와 사랑의 감정도 이와 관련이 있다.

루벤스 작품에는 술과 감각적 도취의 신 바쿠스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세레스와 바쿠스가 없으면 비너스는 추위에 떤다>또한 루벤스의 작품 중 ‘바쿠스적 주제’에 속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세레스(풍작의 여신)와 바쿠스(포도주의 신)가 없으면 비너스는 추위에 떤다’는 라틴어 속담을 회화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로마시대 작가 테렌티우스의 희극 대사를 인용했다.

결국 ‘먹고 마시는 감각적 즐거움을 충족하지 못하면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배가 고프면 사랑도 쓸모 없다’는 진리를 빗대고 있다.

‘바쿠스적 주제’를 담은 또 다른 작품 <바쿠스 축제>는 루벤스의 전작품 가운데 작품의 탄생 과정과 구성의 내용적 의미에 대해 가장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통일성이 없고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물과 정물이라고 하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부분이 한 화면 속에 결합돼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최근 복원 작업을 통해 작품의 전반적인 구성은 정물화로 이뤄졌고, 두 번째 작업 단계에서 비로소 인물을 정물 위에 그린 것이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루벤스는 고르지 않은 구성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감각에 관한 신화를 창조한 셈이다.

그밖에 우리에게 친숙한 동화 ‘플란더스의 개’에 등장하는 루벤스의 시리즈 작품 <안트베르펜 대성당의 대제단화>도 전시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데 이 그림은 플랑드르에 이식된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흥미로운 증거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더욱 주목할 만하다.



윤선희 기자 leonelga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