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순간 포착 번뜩이는 묘사로 시의 품위를 입증김기택 지음/ 창비 펴냄/ 7,000원

건조한 문체와 이성적 통찰로 평단과 독자에게 두루 이름을 알린 김기택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껌>이 출간됐다. 전업 작가를 선언하고 쓴 이번 작품집에서 작가의 사유는 더 냉철해졌고 언어는 한층 객관화됐다.

시가 시인들만의 언어가 된 작금의 현실에서 김기택의 작품은 빛을 발한다. 그는 껌, 삼겹살, 생선과 고양이 등 일상을 둘러싼 풍경에서 소재를 얻고, 풍경의 객관화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시적화자는 주관을 배제한 채 온전히 사물과 대상의 입장에서 말을 내뱉고 있는데, 이런 방식은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을 깨부수는 역할을 한다.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표제작 '껌'중에서)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고양이 죽이기'중에서)

'내 모습의 허공을 덮고 있는 고기냄새의 거푸집이/아직도 손잡이를 잡은 채/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다.'('삼겹살'중에서)

이번 작품집을 이루는 두 축은 살육과 죽음의 현장, 그리고 현대문명의 이기다. 작품 '껌'과 '고양이 죽이기', '삼겹살'등이 전자를 말한다면 '재개발', '고속도로' 등의 작품은 현대문명에 직면한 우리의 상처를 드러낸다.

'오랫동안 떨고 있었는지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다./ 문짝들은 너덜거리거나 떨어져 있다./'사람있음'이란 판자때기를 세워놓고/끝까지 살며 버티던 사람들이 빠져나가자마자/갑자기 늙어버린 집들이/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을 듯이 서 있다.'('미아 재개발 지구' 중에서)

'거무스름한 길이 뽑혀져 나온다./…/박찬호의 직구같은 속도로 뽑혀져 나온다./거칠 것 없이 뽑혀져나오는 속도에 다치지 않으려고/논과 밭, 나무들과 건물들이 좌우로 재빠르게 비켜선다.'('고속도로' 중에서)

이런 시를 통해 독자가 얻는 것은 일상에 내재된 폭력과 상처의 본질이다. 무수한 폭력과 파괴의 기반 위에 우리 삶은 영위되고 나아가 세계도 살육의 현장으로 가득 차 있음을 시는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보여준다.

시집은 일상의 순간을 포착하는 번뜩이는 묘사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차가운 묘사만으로도 시가 품위를 가질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