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의 영역 넓히고 연극·영화·무용 등 장르 아우르는 실험적 예술작품 소개

아무리 크로스오버와 퓨전이 익숙해졌어도 한국에서 다원예술이라는 말은 여전히 낯설게 받아들여진다. 확연히 구분된 예술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원예술이 갖는 태생적 모호함에 종종 당황하고 다시금 명명과 구별의 시도를 반복하기도 한다.

예술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각각의 호오가 갈리는 지점도 이 부분. 그래서 (특히) 한국에서 다원예술 관련 행사는 그것이 지닌 원래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대중에 전달하는데 여전히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때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던 국제다원예술축제는 지난해부터 '페스티벌 봄'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새 단장을 했다. 하지만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다원예술축제로서 보여줬던 성격과 목적은 그대로다.

페스티벌 봄은 여전히 기존의 예술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정신을 가진 예술가들의 작품과 국제적으로 혁신적인 예술작품을 소개하며, 여러 장르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다원예술의 다양한 면모를 선보인다.

올해 페스티벌 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마르크스'라는 이름이다. 봄의 이미지나 다원예술의 발랄함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 이름이다.

하지만 금기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아방가르드라고 할 수 없을 터. 관념과 철학, 과학과 정치과 한데 버물려질 것 같은 그의 이야기가 무대로 스크린으로 옮겨져 관객과 만난다.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선각적 시도로 잘 알려진 독일 극단 리미니 프로토콜은 칼 마르크스의 명저 '자본론(Das Kapital)'을 무대에 올린다.

'자본론'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개 한 번쯤은 들어보긴 했지만 정작 완독해본 사람은 거의 없는 불후의 고전.

그래서 이번 페스티벌의 개막작으로 올려지는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Karl Marx: Das Kapital, Erster Band)'은 단순히 다원예술작품으로서의 의미 외에도 리미니 프로토콜에 의해 재해석된 '자본론'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국에서 '관객'과 '공연자'와의 일대일 전화통화로 이루어졌던 '콜 커타(Call Cutta)'로 알려진 리미니 프로토콜은 실존 인물들의 진술을 무대화하여 현실과 허구의 간극을 허무는 독특한 작업방식으로 새로운 연극의 언어를 만들어온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들은 이 작품을 위해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실제 인물 아홉 명을 무대에 올린다. 신용카드의 적립금에 돈을 보태 비싼 양복을 맞춘 초기 모택동 추종자, 백만장자가 되기를 꿈꾸는 맹인 콜 센터 직원 등이 도서관 거실에서 커피메이커와 축음기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전문 배우가 아닌 이들의 대화에서 작동되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탐구하는 과정은 '자본론'을 접해봤거나 처음 접해보는 관객 모두에게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자본론은 스크린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영화 버전 자본론은 무대 버전보다 원저에 대한 이해를 한층 깊게 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9시간 30분이라는 무시무시한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이 필름은 '뉴 저먼 시네마'의 대부 알렉산더 클루게 감독의 '이념적 고물로부터의 뉴스: 마르크스-에이젠슈테인-자본론(Nachrichten aus der ideologischen Antike: Marx–Eisenstein-Das Kapital)'이다.

영화의 탄생은 1929년 이루어질 '뻔' 했다. 제임스 조이스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자본론'을 영화화하기 위해 만나 대화를 나눈 해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루지 못한 꿈은 80년 후 클루게가 570분에 걸친 대화의 대장정으로 이루게 됐다. '대화'는 클루게의 가장 탁월한 특기.

덕분에 이 필름의 '정체성'은 다큐멘터리이자 에세이이고, 동시에 토크쇼로도 분류됐다. 개방적이면서도 예리하고, 냉철하면서도 섬세한 클루게 특유의 대화방식은 대화 상대의 사유의 깊이를 심화시키며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그들만의 마르크스를 이끌어냈다는 평을 얻고 있다.

한편 이번 페스티벌 봄에는 '최고의 아방가르드 콜렉션'으로 국내외 실험작들이 상상력을 뽐낸다. 가디언지가 뽑은 영국 최고의 실험극단인 포스드 엔터테인먼트의 '스펙타큘라 (Spectacular)'를 비롯해 베를린영화제 아방가르드상 수상작가 빌 모리슨의 '디케이시아(Decasia)'가 유럽의 아방가르드 아트의 최신 조류를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음악가이며 미술가인 어어부프로젝트 백현진의 'THE END'가 박해일, 엄지원, 류승범, 문소리의 얼굴을 통해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또 퍼포먼스와 문학, 뮤지컬,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혼합으로 다원예술의 매력을 보여주는 서현석의 '팻쇼: 영혼의 삼겹살, 혹은 지옥에 모자라는 한 걸음'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함께 두 인물 중 하나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축구선수 지단과 비디오 아트의 만남이다. 영국의 영상작가 더글라스 고든과 알제리 출신의 필리페 파레노가 공동작업한 '지단: 21세기의 초상'은 15대의 35mm 고성능 카메라와 미군이 제공한 2대의 슈퍼확대 카메라를 활용해 '지단'이라는 슈퍼스타를 재해석한다.

즉 다각적인 시선으로 보여지는 지단의 이미지는 단순히 필름에 기록된다는 사실을 넘어 움직이는 신체에 깃든 낯선 무언가를 포착하고 있다.

'페스티벌 봄' 사무국 측은 "전 세계적으로 다원예술은 21세기를 이끌 새로운 현대예술의 형태로 인식되는 반면, 한국은 아직 다원적 개념의 현대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이번 행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사무국 측은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국내외의 다양한 아방가르드 작품을 접하며 다원예술의 흐름을 이해하고 나아가 다원예술이 활성화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를 바란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마르크스부터 지단까지 소재의 영역을 넓히고,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영화 등 장르를 아우르는 실험적인 예술작품을 한데 모은 '페스티벌 봄'은 27일부터 4월 12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과 성남아트센터 등에서 열린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