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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트렌디'한 한글
[한글의 미학]
하이엔드 패션 잡지에서 우리말의 가치 재조명
'몹시' '바삭'에서 느껴지는 패션성





황수현 기자 sooh@hk.co.kr



한글은 멋지다. 한글은 트렌디하다.

당신은 두 문장 중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가. 유행의 첨단을 달려야 하는 패션 잡지 편집장은 어느 쪽을 고를까. 청담동 한복판에 있는 카페의 간판에는 어떤 문장이 어울릴까.

한글은 오래도록 외면돼 왔다. 영어 및 제2 외국어가 주는 이국적이고 특별한 느낌에 밀려 한글은 종종 세련되지 못한 글인 것처럼 인식되곤 했다. 센트럴 파크에는 낙엽이 뒹굴고 연인들이 키스할 것 같지만, 중앙 공원에는 철제 쓰레기통과 뚱뚱한 비둘기만 있을 것 같다는 편견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무리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게 뭐 어떠냐고 부르짖는 남자도 정작 자기 애인의 문제가 되면 고민하듯이, 한글에 대한 관심은 부르짖기 위한 사상 또는 미운 자식을 향한 애증,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패션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어 사용은 조금 더 절박한 문제다. 옷을 사려고 나온 쇼핑객들은 ‘소피스트케이티드(sophisticated)’ 하다는 설명이 붙은 재킷에는 열광하며 품절시켜 버렸지만, 세련된 라인이라는 설명이 붙으면 부인복 취급했다. 패션과 관련된 기사를 쓰는 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 차려 입기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고 말하면 기획안이 통과가 안 돼요. 대신 드레스 업(dress up)의 모든 것에 대해 써보겠다고 말하면 ‘와~ 한번 써봐’ 이렇게 나오죠. 영어의 그 ‘있어 보이는’ 효과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요. 적어도 패션에서는요.”

오죽하면 ‘백수가 아닌 와잇 핸드(white hand)라고 불러달라’는 개그가 등장할까. 하지만 최근에 포착된 몇몇 한글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놀랍다. 포착된 곳이 패션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페일 핑크 대신 돼지 분홍

‘잘 입기로 했어요’ 는 최근 남성 패션 잡지 지큐에서 사용한 제목이다. 컬럼 형식의 기사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패션 화보에 붙은 ‘완벽한 상점’이라는 제목은 어떤가. ‘The perfect store’라는 제목보다 더 패셔너블하게 느껴지는가?

뷰티 기사에는 ‘비누의 귀환’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비누는 화장품 업계에서 도통 쓰지 않는 단어다. 여염집 화장실의 축축한 타일 바닥과 늘어붙은 젖은 머리카락이 동시에 떠올라 2500원 이상으로는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솝(soap)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한 개에 1만~2만원 되는 가격이 합리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목이 주는 느낌은 더 특별하다. 지큐의 이충걸 편집장은 한글 제목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한국이니까요. 패션 업계니까 브이넥(V-neck)이라든가 컬렉션(collection) 같은 외국어는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잇 걸(it girl), 애티튜드(attitude) 같은 단어는 한국적으로 바꿔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대신 머리 좋게 바꿔 야죠. ‘심플’을 이야기할 때 단순한, 간단한으로 번역하면 의미 전달이 잘 안돼요. 그렇다고 한글이 전달력이 부족한 언어는 아니죠. 단정한, 간결한으로 바꿔 쓰면 ‘심플’의 의미가 충분히 전달될 뿐 아니라 어떤 서정성마저 느껴져요. 그건 영어가 대신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물론 영어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목적이 있을 때 사용한다.

“주로 운율을 맞추거나 음이 비슷해서 재미있는 효과를 낼 수 있을 때, 그것도 아니면 그냥 생김새가 예쁠 때 사용해요. 예를 들면 독신 남성에 대한 기사에 ‘Oh~ Solemio’ 대신 ‘Oh~ Solomio’란 제목을 붙이는 식으로요.”





한글 대신 영어가 판치는 대표적인 분야가 색, 즉 컬러를 말할 때다. 빨간 윗옷보다 레드 코트가, 파란 휴대전화 보다 블루 폰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페일 핑크’ 대신 ‘연분홍’이 주는 느낌이 덜 세련됐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 나라 말에 연분홍이라는 단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돼지 분홍’과 같이 창작해낸 단어는 신선할 뿐 아니라 페일 핑크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독자들에게 눈 앞에 그린 것처럼 색을 이야기할 수 있고 사대주의에 대한 비웃음도 실어 날릴 수 있다. 굳이 외국어를 쓰지 않고도 뜻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어휘력을 가지고 있다고 잘난 척할 수도 있다.

마지막 효과는 하이엔드 패션 잡지와 한글이 공존하기 시작한 원인을 말해준다. 최고를 보여 주어야 하는 하이엔드 패션 잡지에서 최고의 사진, 최고의 제품과 함께 당연히 보여주어야 할 소양은 최고의 문장력이 아닌가.

홍대의 ‘시크하고 트렌디’한 한글

물론 하이엔드, 아니 상류 문화에서만 한글이 사랑 받는 것은 아니다. 한글의 멋들어지고 당당한 사용은 이미 홍대 근방에서 시작됐다. 예술가들의 거리 홍대는 소위 돈 벌이에 관심 없는 사람들의 소굴이다. 손님이야 오든 말든 자기가 좋아하는 소품으로 카페를 가득 채우고 하루 종일 텅 빈 가게에서 음악을 듣는 주인장들이 있는 곳이다.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긴 했다. 어쨌든 유독 입신양명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한글 사용이 많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타인의 이목에 자유로운 사람들의 거리에서는 체인점 대신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영어 대신 자연스러운 한글이 주목을 받는가 보다.

1시간 정도 줄을 서야 간신히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초콜릿 카페 ‘몹시’에서 가장 잘 팔리는 메뉴의 이름은 ‘정말 바로 구운 초콜릿 케이크’다. 강력한 전달력도 전달력이지만 무엇보다 국수주의의 무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그 자체로 뛰어난 패션성을 가지고 있다. 카페 라테 대신 사용한 ‘우유 커피’라는 단어와 핫 와인 대신 쓴 ‘데운 포도주’도 촌스럽기는커녕 묘하게 스타일리시하다. 묘한 술책(주점), 카페로온봄(카페), 바삭(튀김집), 틈(카페) 등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약 20년전 ‘시나브로’ 라는 단어가 조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말을 퍼뜨린 사람은 ‘한글 중에도 이렇게 예쁜 게 있다’며 자랑했다. 어딘지 프랑스어와 이탈리어 중간 쯤에 있는 말 같다. 한글 중에서 가장 한글 같지 않은 단어로 자랑하다니 그 자체가 굴욕적이다.

한글의 아름다움은 이런 데 있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서정성과 감동, 오랜 세월을 거쳐 덧 입혀진 사회적 의미 그 자체가 경쟁력이다. 한글은 예뻐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다. 다만 똑똑하게 사용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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