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공원 앞 하이엔드 패션 성지로… 뉴욕, 파리 패션도 공원과 공존

에르메스가 들어섰다. 그 다음은 랄프 로렌이고 그 다음은 마크 제이콥스다. 샤넬도 혹시 모른다. 정부도 끼어 들었다. 안창호 선생 홀로 외롭게 지키던 도산 공원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때는 2006년 여름 늦은 오후였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서 도산 공원으로 향하는 좁은 길을 걸어 올라와 카페 ‘느리게 걷기’를 바라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서 밥 먹고 공원에 가서 키스하면 딱 좋겠다”

그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공원은 한적했고 주변은 조용했다. 지금은 일본 아주머니들의 성지 순례 코스인 욘사마의 레스토랑 ‘고릴라 인 더 키친’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 않을 때였다.

그로부터 3년 남짓이 흐른 지금 도산공원은 조용한 열기로 끓어 오르고 있다. 앞으로 닥칠 거대한 변화를 예감하는지 느리게 걷기가 철수한 건물의 외벽에는 곧 들어설 랄프로렌의 사진이 새겨진 거대한 천막이 웅장하게 펄럭거리고 있다.

청담동의 마지막 카드

패션 칼럼니스트 심우찬은 자신의 저서 ‘청담동 여자들’에서 청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여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위해 변호했다. 이때 그가 말한 청담동이란 행정구역 상의 구분이 아닌 유행의 메카로서의 청담동, 그러니까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청담 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소위 명품 거리를 말한다.

‘버거킹 골목’으로 대변되는 온갖 트렌디한 카페가 몰린 학동 사거리에서부터 도산공원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도산공원은 소위 ‘청담동 구역’의 마지막 남은 미개발지다.

에르메스가 2006년 11월에 10층 짜리 대형 플래그십 매장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를 오픈했을 때 굳이 청담동의 열기를 이곳으로 옮겨오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다.

“공원이 있고 한적하다는 이유로 지사장님이 적극 추천한 장소에요. 그 이후에 상권이 활기를 띤 것은 사실이지만요.” 에르메스 홍보 담당자의 말이다.

에르메스 지사장님의 안목이 남달랐던 건지 아니면 에르메스 효과가 컸던 건지 어쨌든 메종 에르메스 전후로 도산공원 앞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 후로 2년 동안 편집숍이나 해외 패션 브랜드들은 도산공원 주변으로 속속 들어섰으니까. 한섬은 앤드뮐미스터를, 편집숍 무이는 톰그레이하운드 다운스테어즈를, 분더숍은 블러스를 각각 오픈했다.

이유는 역시 ‘한적하니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한적했다.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가로수길이 순식간에 먹자골목처럼 흥청거리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도산공원 앞은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랄프로렌이었다.

“지상 3층, 지하 1층 건물로 완성될 예정이에요. 이 매장은 랄프로렌의 최고가 라인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런웨이에 올랐던 컬렉션 제품들과 함께 국내에 없던 맞춤 라인도 처음으로 시도할 계획이에요. 고객들이 좋아하는 가죽을 고르면 미국 본사에 보내서 완성하는 식으로요.”

랄프로렌 이미양 과장은 말했다. 오는 5월말 완공을 앞두고 있는 랄프로렌의 플래그십 매장은 골목에 숨어 있던 매장들과 달리 대로변으로 나올 예정이라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산공원의 이미지에 패션이라는 단어를 추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좌) 도산공원 앞 길 (우)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그 다음 물망에 오른 후보는 마크 제이콥스와 샤넬. 마크 제이콥스는 “확실하다”고 말했고 샤넬은 “들은 바가 없다”고 말했지만 소문만으로도 청담동 관계자들을 술렁거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에 정부까지 나서서 불을 지폈다. 지난해 지식경제부는 청담동 일대를 패션특화지구로 선정해 7개의 거리로 나눴다.

도산공원 앞을 ‘카페의 거리’로 지정한 것을 보니 선견지명이 다소 부족한 것 같지만 5월에 열리는 강남패션페스티벌에서는 도산공원 앞에 무대를 설치해 패션쇼를 개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패션의 도시 그리고 공원

도산공원이 포스트 청담동이 될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그 태생상 청담동과 같을 수 없다. 일단 거리가 짧다. 차가 다니는 길에서 도산 공원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밖에 안 걸리는 데다가 매장의 크기도 대체로 작은 편이다. 대신 다른 장점이 있다. 길이 널찍해 차량 통행이 용이하고 지하 주차장이 완공되면 주차 문제도 깨끗하게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산공원이 있다.

도산공원은 랜드 마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계 최고의 패션 도시는 모두 공원과 연관이 깊다. 미국 패션의 중심 뉴욕, 그 중에서도 심장부는 패션 스쿨 FIT가 있는 26번가부터 시작된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패션 하우스들의 매장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거리는 42번가에서 멈추는데 여기에 브라이언트 파크가 위치하고 있다.

평소에는 뉴요커들이 볕을 받으며 독서를 하거나 무료 영화를 관람하는 이 공원에는 1년에 두 번씩 거대한 천막이 쳐진다. 세계 각지의 디자이너와 모델, 프레스, 패션 피플들이 몰려드는 뉴욕 패션위크가 바로 이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파리의 튈르리 공원 역시 루브르 박물관 지하와 방돔 광장과 함께 파리 패션위크가 열리는 장소다.

한때 튈르리 궁전의 정원으로 베르사유 궁전의 조경사가 설계한 이 공원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뛰어나 파리지엔들의 자랑 거리다. 에르메스가 메종 에르메스의 입지로 도산공원 앞을 선택한 것도 고향에서 하던 습관이 그대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소비 심리 한가운데 위치한 공원은 언뜻 기이해 보인다. 하지만 복닥거리는 거리에서 한 발 물러나 고고하게 고객을 맞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에게 이만한 공간은 없다. 덕분에 도산공원 앞 거리는 가로수길이 하지 못한 하이엔드 패션의 성지가 될 조건을 이미 갖추었다.

길 초입에는 호림 아트센터가 있고 메종 에르메스 3층에도 갤러리가 있어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단순한 소비의 장이 아닌 문화 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도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