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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의 최첨단 진화 '미워도 다시 한 번
[대중문화 읽기]
최루성 멜로드라마 블록버스터로, 통속극 올인 서바이벌 게임으로 변신





정여울 문학평론가







안방 드라마에 이토록 유능한 여성들이 활개를 치던 때는 없었다. 이 여성들의 공통점은? 첫째, 그녀들은 최소한 대기업 CEO역할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정도의 스케일을 지녔다.

‘미워도 다시 한 번 2009’의 한명인(최명길)은 바람피운 남편과 내연녀에게 복수할 때조차도 주식에 대한 동물적 감각과 능수능란한 언론플레이로 매우 지능적인 플랜을 짠다.

그녀는 복수를 할 때 CEO의 정치경제적 감각을 적극 활용한다. 둘째, 이들은 ‘알파걸’과 ‘수퍼맘’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그들은 역대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알파걸이거나 자식을 위해서라면 비열한 미행이나 잔혹한 사기극조차 무릅쓰는 수퍼맘들이다.

한명인은 서울대와 예일대MBA를 거쳐 아시아 최고여성CEO로 등극했으며 ‘하얀 거짓말’의 신정옥은 며느리를 아들에게 필요한 장난감과 동급으로 취급한다. 셋째, 이들의 주요무기는 포커페이스이며 이들에게는 보통 사람은 쉽게 경험할 수도 없는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다.

친엄마에게조차도 자신의 생사를 알리지 않는 주도면밀함(‘아내의 유혹’)은 기본사양이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설정이 대세다. 이들은 내면과 외면이 완벽히 분리된 삶을 추구함으로써 끝내 원하는 것을 쟁취해낸다.

특히 ‘미워도 다시 한 번 2009’는 전형적 신파극의 최루성 멜로드라마보다는 ‘2009’라는 숫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신파와 통속을 지향할 것을 노골적으로 밝히면서 굳이 ‘2009’라는 숫자를 표시한 것은 신파자체보다는 신파의 최첨단 진화를 강조하는 징후처럼 보인다.

한명인은 드라마 역사상 초유의 여성적 카리스마를 구현한다. 1968년작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단아한 꽃병처럼 음전하고 우아하게 본처의 자리를 지키던 현모양처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한명인은 이성애도 동성애도 아닌 모성애로 무장한 캐릭터이며 첫사랑을 잃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자폐적 상태를 30년이나 고수해왔다.

그녀에게 권선징악이라는 낡은 화두는 철저히 폐기처분되었으며 다만 위험천만한 정글에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만이 생존의 이유다. 그녀는 남성의 관찰대상이 아니라 삶이라는 연극판 전체를 뒤흔드는 총감독의 역할을 자임한다. 이 서바이벌게임에서는 모두가 피해자며 모두가 가해자다. 모든 연기자가 열과 성의를 다해 서로를 향한 물고 물리는 복수를 기획한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최고의 복수를 기획하는 한회장의 내면이 가장 치명적으로 붕괴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경안정제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한회장의 아킬레스건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은 첫사랑이다. 첫사랑을 향한 변함없는 노스탤지아와 30년간 각방 써온 남편과의 새로운 로맨스가 한명인의 영혼을 뒤흔든다.

내연녀 은혜정이 오히려 본처처럼 행세하고 조강지처 한명인이 남편 이정훈의 때늦은 순정을 자극하는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본처와 정부(情婦)의 역전’ 또한 상큼하다. 이 뒤늦은 로맨스는 복수의 고통으로 찌든 한회장의 오아시스다. 청춘의 열정이 사그라진 자리에는 평범한 삶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묻어 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2009’의 방점은 ‘아파도 너는 내 사랑 미워도 너는 내 사랑’이라는 식의 멜로 감수성보다도 ‘2009’라는 업그레이드의 낙인에 찍힌다. 이 드라마는 신파를 블록버스터로 화학변화 시키고, 통속극을 올인 서바이벌 게임으로 변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이기에 갈등의 판돈은 커지며 주인공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여 서바이벌 게임을 벌인다. 예일대 출신의 대기업 총수 한명인, 레드카펫을 가장 많이 밟은 국민배우 은혜정, 9시 뉴스의 사령탑을 지켰으며 한국의 힐러리를 꿈꾸는 최윤희. 드라마의 삼각관계는 한명인-이정훈-은혜정이 아니라 은혜정-한명인-최윤희에 이르러 더욱 격렬한 스릴과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한명인은 기존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던 천민적 감수성을 풀풀 풍기는 졸부가 아니라 최고의 인텔리다. 그림을 재테크 대상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적 가치로 평가하는 심미안까지 지녔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진정한 매혹은 단지 한명인을 비롯한 초절정 알파걸들의 초인적 능력이 아니다. 문제는 한명인은 물론 주요인물들이 하나같이 ‘모든 것을 다 가졌음에도 절대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진화를 거부하는 원초적 순정의 감동은 여기서 잉태된다.

주인공들은 저마다 치명적인 트라우마로 얼룩진 내면의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들의 사회적 위치는 눈부시게 업그레이드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30년전 상처를 세포 깊숙이 숨겨두고 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첫사랑 김유석의 아틀리에는 한회장의 트라우마로 얼룩진 기억의 고물창고이기도 하면서 그녀가 잃어버린 순수의 상징이다.

속물적 세계의 생존전략을 완벽히 터득한 그들의 내면에는 저마다 여전히 상처입어 홀로 울고 있는 내면의 아이들이 성장을 거부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겁에 질려 있음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변장술을 자랑하지만 그 두려움을 어루만져줄 지음(知音)의 친구를 간절히 원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드라마가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적 가능성을 녹여낸 듯한 뜨거운 용광로다.

그 용광로에서 만들어진 불화살은 바로, 아무리 문명이 진화해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변하지 않는, 동일한 인간의 조건을 겨냥한다. 그것은 매일밤 독한 수면제를 집어 삼키며 각종 향정신성 알약으로 버티는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인간이란 과연 사랑받을 만한 존재인지, 인생이란 과연 살아볼 만한 실체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대답을 니체에게 구한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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