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연극·전시·소설 등 다양한 융합의 산물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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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학의 생물학 연구실에 뜻밖의 손님이 도착한다. 배양액에 담긴 뇌다. 과학자들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살아 있나요?” 뇌를 가져온 이는 잠깐 망설인다. “최선의 상태로, 유기적인 상태로 보존하고 있죠.”
지난 3월24일부터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과학연극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공연되고 있는 연극 ‘과학하는 마음 3-발칸동물원’(이하 ‘발칸동물원’)의 한 장면이다. 연극 내내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뇌 이식은 뇌사한 사람에게 뇌를 이식하는 것인지, 뇌만 남은 사람에게 다른 신체 부위를 이식하는 것인지”, “온몸 중 인공장기가 몇 퍼센트 있을 때까지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등이다.
아이의 자폐증을 치료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으로 자폐증 원숭이를 ‘만들어’ 연구하는 과학자의 에피소드에서는 연구윤리 문제가 제기된다.
‘발칸동물원’: ‘과학예술’의 모범 사례
최근 과학과 예술이 본격적으로 ‘융합’한 결과물들이 선보이고 있다. 과학 지식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방식으로써 예술 형식을 빌려오거나, 예술에 과학 소재를 도입한 초기 시도들의 수준을 넘어선 것들이다. 일본의 원작을 번안한 ‘발칸동물원’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자 본보기다.
히라타 오리자 원작의 이 연극은 2010년 미래 사회(현재 국내 공연에서는 시대 언급이 빠져 있음)를 배경으로 장기이식, 뇌과학 등의 과학 이슈를 연구실에서의 일상적 에피소드로 풀어냈다. 연구실 내부를 조명했지만, 내용은 극이 쓰인 1997년 당시의 시대상을 아우르고 있다.
예를 들면 극중 언급되는 가상의 유럽 전쟁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을 모델로 설정됐다. 이 전쟁의 특징은 민족 간 갈등이 첨예했다는 것. 등장 인물들은 대참사를 불러온 민족 구분이 실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논의한다.
이 연극에서 과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현실의 문제들을 조망하고 해결 방향을 판단하는 근거이자 논리다. 3월31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왜, 과학연극인가’ 포럼에서 서강대 이덕환 화학과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자연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논리적 분석을 통해 얻어낸 과학 지식이 사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세계관의 핵심”임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과학-예술 융합으로 미래를 모색
이처럼 과학과 밀접하게 융합한 예술은 한 시대의 세계관이 어떻게 삶과 문화에 녹아들 수 있는지 예시한다. 이를 통해 현재를 비추어보고 미래를 고민하게 해준다. 이덕환 교수는 과학연극의 역할에 대해 “현대과학을 근거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예술적 감각으로 표현하고, 예술적 감각을 이용해 현대 기술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치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에서 과학-예술 융합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시도되어 온 배경에는 시대적 위기 의식이 있었다.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인 아트센터 나비의 노소영 관장은 2007년 펴낸 ‘예술, 과학과 만나다’ 서문에서 “과학기술은 그 역작용을 우려하는 경고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현대의 신’이 되어 버렸고 인간성의 보루였던 예술의 사회적 위상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홍성욱 교수는 같은 책에서 “예술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낳을 수 있는 부작용과 윤리적 문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값진 기회를 제공한다”고 설명했다.(‘과학과 예술: 그 수렴과 접점을 위한 역사적 시론’) 예술은 과학의 다양한 ‘결과’들을 미리 상상하고 구현함으로써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이나 맹목적 비판 같은 극단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미래’를 구상하는 방향의 융합 프로젝트가 부쩍 늘어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작년 11월 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한 국립과천과학관 개관전 ‘2008 과학과 예술의 만남’ 전은 지구의 빛, 과학의 상상, 예술의 꿈’을 슬로건으로 삼았다. UN이 정한 ‘세계 지구의 해’를 맞아 환경 오염, 기후 변화, 에너지 고갈 등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색한다는 의도였다.
사비나미술관은 올해 초 ‘2050 Future Scope: 예술가와 과학자의 미래실험실’ 전을 열었다. 예술가와 과학자가 함께 ‘미래’라는 주제로 워크샵을 한 후 작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1년간 진행된 협업 프로젝트의 결과였다. 우선미 큐레이터는 ‘환경’, ‘뇌과학’, ‘가상현실’, ‘나노 기술’이 “우리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칠 이슈”라고 판단해 소주제로 삼았다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아주대학교 박영무 기계공학과 교수는 “학문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융합 되지 않은 ‘낱개 지식’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과학과 예술은 사회와 소통하며 발전하고 또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과학은 예술을 통해 문화가 되어야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정재승, 김탁환 교수는 올해 초부터 동아일보에 과학소설 ‘눈 먼 시계공’을 연재하고 있다. 첨단 뇌과학을 이용한 살인사건과 로봇들의 격투기 대회 등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가까운 미래 배경의 SF 추리 소설이다.
물리학자와 소설가의 협동 작업으로는 최초다. 두 필자가 매일 각자 일정 분량을 쓴 뒤 바꾸어서 퇴고하는 식으로 함께 쓴다. 정 교수의 표현처럼 “화학적인 과정”이다.
이런 과정은 결과물의 내용에도 영향을 미친다. 물리학자인 정 교수가 사건들의 관계, 인물들의 역할 같은 얼개를 짜면, 소설가인 김 교수가 거기에 세부 요소를 더한다. 정 교수가 ‘2049년 서울’이라는 배경을 설정하면 김 교수는 그곳이 어떤 풍경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구상하는 식이다. 과학적 통찰력이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구체화된다.
낯선 상황이 펼쳐지지만 이 소설의 메시지는 근본적이다. “인간은 평생 숫자에 갇혀 산다. 때론 불편함을 호소하더라도 기대면 편하고 든든한 것이 숫자다. 그 숫자를 버리고 탈주하려는 인간 역시 적지 않다. 나를 숫자 따위로 규정하지 말라. 난 숫자 이상이다. 로봇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숫자 이상을 이해하고 의지를 품을 때다”(17회) 같은 구절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배경을 가까운 미래로 정한 것도 현실과 너무 거리를 두지 않기 위해서다. 필자들이 일간지 연재를 결심한 것은 “이 정도 과학 소설은 대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재승 교수는 “과학의 발전은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발전하는 순간은 사회 구성원들이 새로운 과학 지식을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때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학이 문화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연극은 인간을 설명하는 '눈'을 제공"
-연출 계기는 |
"과학소설은 과학을 체험하는 데 기여"
-소설 연재하게 된 계기는 |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