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무릎팍도사'등 예능프로그램

1-무릎팍도사
2-놀러와
3-세바퀴
4-해피투게더
5-골드미스가 간다

최근 예능계는 ‘밑도 끝도 없는 수다’의 미학을 실험하는 각종 기획들로 풍성해졌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무대 뒤편 분장실이나 녹화 후 뒷풀이에서나 가능했던 ‘잡담’들이 이제는 버젓이 프로그램의 주메뉴로 급부상했다.

MBC ‘황금어장-무릎팍도사’(이하 ‘무릎팍도사’)는 고민상담을 표방하며 우스꽝스러운 춤과 촌스러운 의상으로 스타들의 혼을 쏙 빼놓는다. 무릎팍도사들은 스타들의 닫힌 마음의 자물쇠를 활짝 열게 하는 물귀신 전략으로 ‘예능의 수다화’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MBC ‘놀러와’는 특별한 필살기 없이도 MC 유재석 김원희의 무한한 친화력과 재치로 스타들의 사소한 잡담이 지닌 자잘한 매혹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KBS ‘해피투게더’는 사우나에서 땀을 빼며 화려한 분장을 모두 배제한 소박함과 촌스러움으로 아줌마식 수다의 저력을 보여주며 장수하고 있다.

MBC ‘세상을 바꾸는 퀴즈’(이하 ‘세바퀴’)와 SBS ‘일요일이 좋다-골드미스가 간다’(이하 ‘골미다’)는 여성적 수다가 다다를 수 있는 정점을 보여주는 한국형 예능프로그램의 최첨단 진화를 보여준다. 이 프로그램들은 이메일과 문자메시지, 미니홈피 방명록과 메신저 토크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현대인의 ‘수다를 향한 무한 갈증’을 해소해준 ‘TV 속 밤문화’의 일등공신들이다.

‘데이비드 레터맨 쇼’나 ‘오프라 윈프리쇼’를 비롯한 서구형 토크쇼는 일단 게스트들을 소파에 얌전히 앉혀 놓고 주어진 각본에 따라 충실하게 움직이는 ‘준비된 담화’다. 그러나 한국형 토크쇼는 한국형 ‘방문화’를 십분 활용하여 게스트들을 방바닥에 철퍼덕 앉히거나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도록 각종 몸개그를 유도한다.

‘무릎팍도사’는 게스트들을 번쩍 들어 방바닥에 앉히고, ‘해피투게더’는 사우나복을 입고 분장도 지운 채 아줌마형 파마가발까지 씌워 게스트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세바퀴’의 게스트들은 각자의 정해진 좌석이 무색할 정도로 자발적으로 자리를 이탈하여 춤을 추고 몸개그를 해내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줌마형 수다의 결정판을 보여준다.

‘골미다’는 아예 30세 이상 골드 미스들을 각자의 방에 몰아넣고 그들만의 내밀한 수다와 비밀을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들에게는 주어진 대본에만 충실한 것이 오히려 ‘수치’이며 창조적 애드립과 즉흥적 뒷담화가 흥행보증수표 역할을 한다.

노래방, 찜질방 등 각종 ‘방문화’에 길들여진 한국인들의 정서를 활용한 이 ‘좌식형 수다’들은 시청자로 하여금 대단한 스타들을 우러러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처럼’ 수다에 미치고 주전부리에 열광하는 보통사람임을 확인케 한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스타들의 쇼맨십보다는 그들의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경험의 힘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치밀한 준비로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하고 완벽한 무대만이 스타들의 필살기는 아니다. 그 무대위에서 그토록 빛나기 위해 그들이 감수한 고통과 밤새워 넋두리를 늘어놓아도 모자랄 우여곡절들이 시청자들을 감동시킨다.

최양락을 비롯하여 수많은 왕년의 스타들이 새삼 호출되는 것은 그들만이 겪어낸 경험의 깊이 때문이 아닐까. ‘놀러와’를 통해 재발견된 작곡가 김태원의 절절한 라이프 스토리와 선문답형 개그가 주는 감동은 시청자들의 요구가 단지 말초적 유머와 슬랩스틱 몸 개그에 있지 않음을 증명한다. 기나긴 슬럼프와 마약 스캔들도 훼손시킬 수 없었던 그의 순수한 열정과 음악적 재능은 그의 오랜 방황을 말없이 지켜봐 준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 결혼했어요’의 폭발적 인기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세바퀴’는 어느새 아줌마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세상살이의 넓이와 깊이로 무장한 촌철살인의 유머로 ‘세바퀴 독립’의 신화를 일구어냈다.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낼 공간이 부족하다. 1인가족은 증가일로에 있으며 설사 가족이 모두 함께 살아도 한 방에 모여 야식을 챙겨 먹으며 수다를 떨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사라져간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로 획일화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사람의 음성과 사람의 몸짓이 전달할 수 있는 온기와 열정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비좁은 그릇이다. ‘밤마실’이라는 정겨운 놀이문화를 몸소 체험하여 알고 있는 어린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파트나 원룸의 공간 구조에 익숙해진 신세대들은 타인의 방문에 대해 조건 없는 반가움보다는 무조건적인 경계심을 학습해야 했다. ‘놀러와’의 ‘골방토크’ 코너는 친구들과 방에 틀어박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은밀한 기쁨을 환기시킨다.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Yes/No’ 버튼을 누르는 것은 어린 시절 방구석에서 친구들과 이불을 덮고 즐기던 ‘전기놀이’의 짜릿한 기쁨을 떠올리게 한다.

게임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 그저 친구네 집 방에만 밀어 넣어도 하루종일 잘 놀던 아이들은 끊임없이 창조적인 놀이종목을 개발하곤 했다. 별다른 엔터테인먼트가 없었던 시절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수시로 이웃을 드나들던 정겨운 소통의 문화는 ‘마실’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에 아로새겨져 있다.

엄청난 사건이 없어도, 의도한 목적이 없어도, 단지 이웃과 친구가 예고 없이 대문을 두드려도 마냥 반갑던 시절, 사람들은 철옹성 같은 ‘프라이버시’보다는 언제든 타인을 향해 마음 쓸 준비가 된 드넓은 ‘오지랖’을 사랑했다.

철학자 벤야민은 ‘정보’와 ‘이야기’의 차이를 강조하며 ‘이야기’만이 지닌 아우라를 예찬한 바 있다. 뉴스처럼 하루하루 스쳐가는 ‘정보’는 일회적으로 소비되며 개개인의 경험목록에 의미있게 축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목소리로 발화된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매순간 새로운 숨결을 얻는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나’라는 존재의 단단한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타인의 삶을 느낀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결코 섭취할 수 없는 이야기의 힘은 한기에 떨고 있는 우리의 삶을 녹이는 모닥불과 같은 존재다. 정보는 더 새롭고 자극적인 또 다른 정보로 대체될 수 있지만 저마다 소중한 이야기의 아우라는 그 어떤 다른 이야기로도 대체될 수 없다.

스타를 통해 펼쳐지는 질펀한 수다의 향연 속에서 우리는 이렇듯 ‘타인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삶의 온기를 호흡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