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읽기] '스타벅스화'와 '로컬리티

R&B 가수이자 작곡가인 휘성이 최근 발표해서 인기를 모은 곡 ‘Insomnia’는 휘성이 작곡한 곡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작곡가가 준 신곡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종의 리메이크인데,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것도 아니다.

그럼 이 곡의 정체는 뭘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동시적 리메이크’다. 이 곡을 만든 이는 영국의 R&B 가수인 크레이그 데이빗(Craig David)이다. 이른바 투스텝(2 Step), 혹은 UK 거라지(UK Garage)라 불리는 일렉트로닉 성향의 R&B 스타일을 대중화시킨 장본인으로 꼽힌다.

이 곡은 그의 베스트 음반에 실린 신곡인데, 그 음반의 국내 발매에 맞춰 휘성이 이 곡을 새로 편곡한 뒤 한국어로 가사를 바꿔 부른 것이다. 원곡과 비교해보면 그리 큰 차이가 없다. 휘성 버전이 비트와 사운드가 약간 더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고, 거기에 아기자기한 장식이 덧대어져 있는 정도다. 가사가 입에 붙는 건 한국어 버전이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성공적인 리메이크라 할 만하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건 그 점이다. 차이가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게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것.

한국의 대중음악에는 ‘번안 가요’의 전통이 있다. 외국 곡에 한국어 가사를 붙여 부르는 가요 말이다. 트윈 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이나 양병집의 ‘떠나지 말아요’,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 같은 곡들이 번안 가요의 대표작들이다. 이 곡들은, 아무리 번안이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듣다 보면 일종의 ‘간극’이 느껴졌다. 원곡과 비교할 경우는 특히 더 그랬다.

한국어 노래와 외국어(라고는 하지만 주로 영어) 노래 사이에는 선율과 화성의 진행이나 그 선율에 달라붙는 가사의 점성(性)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Insomnia’에는 그 차이가 없다.

그래서 궁금한데, 만약 ‘Insomnia’에서 작곡자 이름을 가리고 그냥 휘성의 신곡이라고 했다면, 혹은 빅뱅이나 박진영이 준 곡이라고 했으면, 사람들은 그걸 믿었을까 믿지 않았을까? 믿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한국의 대중음악이, 특히 댄스음악의 경우, 일종의 동시대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라면 과장된 것일까? 이 말을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한국의 대중음악이 동시대성을 획득했다는 것은 ‘우리 음악이 외국 음악의 수준에 맞먹게 되었다’거나 ‘이제는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 음악이 자랑스럽다’는 식의 이상한 자부심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단순하다. 외국의 트렌드에 대한 동시대적인 반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들이 하면 우리가 하고, 우리가 하는 건 그들도 하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일 거다. 인터넷, 세계화, 신자유주의, 등등. 그러나 여기서 그에 대해 얘기하긴 지면이 모자라다.

그러나 한국 대중음악이 동시대성을 획득했다는 것이 암시하는 바는 그렇게까지 단순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그것은 한국 대중음악 시장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마케팅 방법 중 하나가 이제 쓸모없어졌음을 뜻한다. 편의상 그 방법을 ‘장르 수입 마케팅’이라 불러보기로 하자. 몇 년 전만 해도 외국의 최신 음악 스타일을 우리 가요에 적용했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대단한 성취인 것처럼 홍보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듯이, 이런 식이다. ‘우리는 신곡에서 영국의 최신 댄스 장르인 정글과 레이브를 시도했어요.’ 같은 말들 말이다. 정작 들어보면 처음에 그런 거 좀 하는 척 하다가 결국 신서사이저로 대충 도배한 ‘보통의 땐쓰 가요’로 돌아가긴 했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뮤지션의 경우 내놓는 음반마다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는 것이 대단한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의 홍보 방법은, 혹은 장르에 포커스를 맞춰 자신들의 음악을 차별화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진부한 방법이 되었다. 다행히도 말이다.

물론 그럼으로써 안고 가야 할 위험은 있다. 그걸 음악 창조와 청취 경험에 있어서의 스타벅스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비슷한 반응을 한다는 것은 달리 취할 수 있는 반응이 없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주류 댄스음악이 그동안 축적해 왔던 노하우를 제대로 다루는 법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증거들이 최근 들어 속속 나오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에 대한 걱정을 좀 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더 이상 ‘그들’의 뒤를 따라갈 필요가 없어지면서 거둔 가장 큰 성과다. 동방신기, 브라운 아이드 걸스, 카라 등의 아이돌 댄스 음악이 요즘처럼 그럴듯하게 들린 적이 언제였을까. 빅뱅의 멤버 태양이 내놓은 세련된 R&B 음악과 소녀시대의 ‘Gee’와 같은 곡에서 들리는 감각적인 진행과 비트는 분명 외국의 트렌드와 동시대적인 것이지만, 그건 본토의 ‘진짜배기들’에 대한 ‘대체물’이나 ‘짝퉁’이 아니다.

이런 경향을, 반드시 ‘스타벅스화’와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로컬리티’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손담비의 ‘토요일밤에’와 같은 곡을 보자. 이 곡은 1980년대 댄스 가요에 대한 복고적 해석이다. 복고 자체는 이미 오래된 트렌드니 신선할 게 없다. 그러나 그 복고의 대상이 원더걸스의 ‘Tell Me’처럼 롤라장을 울리던 외국 댄스 음악, 즉 ‘그들’의 음악이 아니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곡은 김완선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후반의 댄스 가요에 대한 재해석이다. 즉 TV 앞에서 사람들을 홀리던 ‘우리’의 음악인 것이다. 사실 ‘토요일밤에’의 경우 그 시도가 성공했다 보기는 어렵다. 손담비는 김완선이 아니며, 곡 자체도 그 시절의 아우라와 작금의 트렌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이는 긍정적으로 평가 받을 가치가 있다.

다만 그 긍정적 평가는 한국 대중음악의 산업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나온 것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 결코 일이 순리대로 잘 돌아가서 나오는 결과는 아닌 것이다. 그걸 대단하다 해야 할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민우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