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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띠 같은 삶과 죽음의 고리
[시네마] 마를린 호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
가부장적 남성 시각에 반기… 여성의 끈질긴 생명력 예찬





김시무 영화평론가







지난 1997년 개봉되어 페미니즘 영화의 한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던 네덜란드 출신의 여성감독 마를린 호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 Antonia's Line’(1995)이 재개봉된다. 12년 전 이 작품을 감동적으로 보았던 평자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산이 한번 변하는 시간동안 여성의 시각에서 본 이른바 페미니즘 계열의 영화들이 무수히 제작되고 상영되었지만, ‘안토니아스 라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이보다 한발 앞서 소개된 영국영화 ‘프리스트 Priest’(1994) 정도가 이에 비견될 수 있을까?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사람인 지미 맥거번이 시나리오를 쓰고 BBC 방송국의 걸출한 여성감독인 안토니아 버드가 연출을 맡은 ‘프리스트’는 카톨릭 교단이 금기시 하고 있는 소재들만을 의도적으로 전면에 내세운 참으로 논쟁적인 영화였다. 공교롭게도 감독 이름과 극중 캐릭터 이름이 같다.

버드 감독은 “교황의 콘돔 사용 불허 발언을 듣고 이 영화의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요컨대 감독은 ‘에이즈’가 만연하고 있는 시대에 현실을 무시하고 교리만을 고집하는 카톨릭 교단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사제’라는 뜻의 이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신부의 사적인 연애’ ‘동성애’ ‘근친상간’ ‘고해성사의 발설’ 등과 같은 첨예한 문제들을 모티브로 하여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욕망 사이에서 고뇌하는 한 신부의 이야기를 탁월한 플롯구성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물론 한편에서는 쓰레기 같은 영화라는 비난도 있었다. 이에 대한 판단은 역시 관객의 몫이다.

마를린 호리스 감독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색다른 차원에서 ‘안토니아스 라인’을 펼쳐 나간다. 감히 비유하자면, 여성주의 영화의 ‘구약성서’와도 같은 영화가 바로 ‘안토니아스 라인’이라면, ‘신약성서’와도 같은 작품이 다름 아닌 ‘프리스트’라고 할까?

요컨대 두 여성 감독은 가부장적인 남성의 시각위주로 기술된 성서를 비틀고 뒤집는 방식으로 영화작업에 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이 남성의 관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성서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순결(純潔)을 설교하면서 고해성사를 하러온 처녀에게 성추행을 하는 주임신부의 위선과 기만을 가차 없이 폭로한다. 게다가 성의(聖衣)를 벗어버리고 마침내 ‘성의 자유’를 찾아 나선 보좌신부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이른바 ‘죽음의 종교’에 대한 치명타로 여겨진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이처럼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음에도 무척이나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른바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들을 자주 접해 왔지만, 이 영화는 뚜렷한 여성의 시각을 고수하면서도 따듯한 인간애를 저변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격을 달리한다.

게다가 이 영화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풍자(諷刺)와 해학(諧謔)을 통해 그 중압감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지난 제68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제20회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상을, 그리고 제15회 네덜란드 필름페스티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그 여파로 국내에 수입되어 매니아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네덜란드의 한 평온한 마을에 안토니아(빌레케 반 아믈로이)와 그녀의 딸 다니엘(엘스 도터만스)이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안토니아의 어머니인 일레곤다(도라 반 더 그로엔)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시 영화는 증손녀인 사라(티르자 라베스테즌)가 안토니아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난다. 이러한 순환구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 있는 삶과 죽음의 고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 영화에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몇 가지 ‘안티테제적인’ 요소가 깔려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그 근저에서부터 전복하고자 한다. 안토니아는 ‘탕녀’라고 손가락질 당할 만큼 자유분방한 여성이지만, 강간과 약탈을 일삼는 마을의 훼방꾼을 응징하는 해방자(解放者)이기도 하다.

그녀는 또 아들만 다섯을 둔 홀아비 농부 바스(얀 데클레어)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를 즐긴다. 한편 다니엘은 사물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능력을 가진 아마추어 화가이다. 그녀는 씨받이를 통해 딸아이를 낳는가 하면 여성 가정교사인 라라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녀에게 라라는 비너스 여신으로 보인다.

다니엘의 딸 테레사(비를레 반 오버로프)는 타고난 ‘천재’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마을의 염세주의 철학자인 ‘굽은 손’(밀 세게스)과 니체를 논하며 성장한다. 그녀는 파격적인 결혼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와 남편의 전통적 위치도 전도된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모성본능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녀의 딸 사라는 삶과 죽음을 꿰뚫어 보는 꼬마 시인이다.

나중에 그녀가 극중의 화자(내레이터)임이 밝혀진다. 또한 이 영화는 기존의 남성위주의 가계(家系)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았다”라는 식의 족보가 폐기되고, 대신 일레곤다는 안토니아를, 안토니아는 다니엘을, 다니엘은 테레사를, 테레사는 사라를 낳았다는 식의 새로운 가계가 탄생한다.

그래서 영화제목이 ‘안토니아스 라인’인 것이다. 혹자는 이 같은 여성들만의 계보가 너무 일률적이고 그리하여 현실성이 떨어지는 낭만적 해결책이라는 점을 들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삶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안토니아스 라인’의 미덕은 주제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제를 전달하는 영상미에서도 여성적 감수성과 자연미가 물씬 넘쳐난다. 반 고흐의 화폭을 연상시키는 듯한 빼어난 영상에 담은 ‘여성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마를린 호리스의 예찬(禮讚)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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