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파워갤러리] (3) 공화랑'신의 눈' 공창호 대표, 故 이병철 회장이 컬렉션 의뢰할 정도의 권위자"지속적 컬렉션 통해 고미술 박물관 짓는 게 꿈"

비단 족자 속, 호랑이의 붉은 눈이 보는 이를 응시하고 있다. 꼬리를 치켜들고 당돌하게 바라보지만 그 눈빛은 오히려 푸근하다. 또 한 마리의 호랑이, 이는 유리 속에 갇혀 있지만 기운만은 이미 액자를 뚫고 나왔다. 집안의 수호신으로, 액을 막아 준다고 하여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에서 정월 초하루에 주고받던 선물 목록 중 하나였다.

공화랑 3층, 공창호 대표(62)의 집무실. 은은한 노란빛이 감도는 이곳은 유구한 세월 속에서 멋이 더해진 고서화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이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자리하고 있다. 비단 족자 속 한 마리는 현재 심사정의 송하노호도(松下老虎圖)이고, 유리 속 한 마리는 단원 김홍도의 월하맹호도(月下猛虎圖)이다.

“현재의 호랑이는 근엄하다고 할까. 친근한 느낌도 드는 것이 노호라고 볼 수 있어요. 몸을 틀어서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 느긋하죠. 아직 배가 덜 고파서 주변을 단지 탐색하고만 있죠. 그런데 이걸 봐요. 단원의 호랑이는 칼칼한 매서움이 있죠? 건장한 청년 같은 강인함. 털은 쭈뼛 서 있고 근육엔 힘이 주어져 있어요. 배가 쏙 들어간 걸 보니 이 녀석은 아주 배가 고파. 귀는 쫑긋 서 있고 눈에 힘이 탁 들어간 것이 지금 뭔가를 본거라고. 사격할 태세인거죠.”

하나의 작품을 설명하기엔 한 시간도 부족하다는 그의 해설을 잠시 듣고 있자니 고서화 속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서양회화 속에서 흔히 읽혀지던 문화적 코드와 스토리텔링은 한국의 고서화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호랑이를 좋아한다던 공 대표는 기가 빠져나간다며 입 벌린 호랑이를 그리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대가들의 이야기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입 벌린 호랑이가 등장했다는 미술사를 곁들였다.

어린 시절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서예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검여 유희강, 일중 김충현, 청명 임창순, 노촌 이구영 선생께 한학과 서예를 배우며 작품 보는 눈을 날카롭게 닦았다. 타고난 심미안에 학식이 더해졌고 화랑 이전에 운영했던 표구사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신의 눈’이라 불리는 감식안을 안겨주었다.

삼성그룹 창업자 故 이병철 회장이 20대이던 공창호 대표에게 고미술 컬렉션을 의뢰해왔을 정도로 그는 업계에서 이미 유명 인사이자 권위자였다.

“표구를 하다보면 많은 재질과 안료를 연구할 수 있어요. 작품에 구멍이 나서 복원을 하려면 200년 전의 천, 300년 전의 종이같이 작품이 제작된 시기와 같은 재질을 사용해야 하거든요. 자연히 재질 연구가 되죠. 또 당시엔 모두 천연 안료를 사용했습니다. 짚 썩은 것을 한약처럼 달여서 한다던지, 가지 물을 빼서 쓴다던지,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천연 안료를 사용했죠. 복원한다고 화공약품을 쓰잖아요? 세탁하면 그 부분은 싹 지워집니다. 하지만 천연 색채는 고스란히 남아있죠.”

고미술에는 원칙이 있어 진품과 위작의 경계가 분명하다는 그는 섣부른 판단이 진품을 위작으로 낙인찍는 경우가 가장 안타깝다고 했다. “대가의 특징이 있어요. 그걸 골격이라고 합니다. 골격과 리듬, 흐름, 강약, 그리고 원근이 확실해야 합니다. 여기에 낙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죠.”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낙관만은 선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진품을 위작으로 알고 낙관을 지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 고미술의 안타까움은 진위 논란에만 있지 않다. 상당량의 한국 고미술품이 왜구의 약탈로 상당량 해외로 반출된 역사적 아픔도 가지고 있다. 이는 공 대표가 일본을 자주 드나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한국에서 약탈한 작품뿐 아니라 북한에 있는 고미술품이 유통되고 있다.

심사정의 송하노호도가 5대에 걸쳐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일본인을 수십 번 찾아가 설득한 끝에 구입한 작품이다. 국보 218호로 지정된 고려 불화 아미타불(호암미술관 소장) 역시 그가 일본에서 발견했다.

“고려 불화를 만났을 때 정말 전기가 오른 듯 찌릿했어요. 그 전까지 한국에 있는 고려 불화는 ‘나한도’ 몇 장이 전부였거든요. 이들 작품 말고도 세대를 뛰어 넘어 긍재 김득신이 그림을 그리고 추사 김정희가 글을 쓴 작품이라던가, 단원 김홍도가 호랑이를 그리고 능산 황기천이 화제(그림 위에 쓰는 시문)를 쓰고, 대나무와 난초를 잘 그렸던 임희지가 대나무를 그려 넣은 삼인 합작품도 기억에 남습니다.”

좋은 작품을 찾아내는 예리한 눈과 더불어 필요한 것은 지극한 정성과 두둑한 배짱임을 체득하고 있었다. 최근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도 그는 정중 이암의 작품과 함께 돌아왔다. 비둘기 한 쌍과 꽃과 나비가 있는 작품으로 이암은 삼원삼재(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식, 현재 심사정)를 뛰어넘는 조선시대의 왕족화가이다.

고서화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그는 그림을 보면 무슨 붓을 썼는지, 누구의 계통을 따랐는지는 물론이고 초년, 중년, 말년의 작품인지, 건강할 때의 작품인지, 병이 났을 때인지, 취기가 있을 때인지 등 화가의 상황까지도 눈에 보일 듯 읽어냈다.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현재 고려대에서 도자기 공부하는 아들 상구 씨와 북경 공화랑의 대표를 맡고 있는 딸 문영 씨가 아버지를 이어갈 준비를 차근히 밟아가고 있다. 공 대표는 앞으로 현대작가 위주로 공화랑을 운영하고 고미술은 지속적인 컬렉션을 통해 20년 안에 고미술 박물관을 짓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고서화에 초점을 맞춰서 한국에 오면 전 세계 사람들이 꼭 들러서 구경하는 곳을 만들고 싶어요. 하지만 서두르지는 않을 겁니다. 혹시라도 내가 못하면 아이들이 이룰 수 있게 차근차근 준비해 가려고 합니다.”

좋은 작품을 보면 잠을 자다가도 깨서 볼 정도로 그는 여전히 고서화에 푹 빠져 있다. 진정 예술적 감흥으로 마음이 통하는 벗 앞에서는 돈도 무의미해진다는 그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잠시 손에 든 고서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서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말없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공화랑 & 북경 공화랑


1982년 공창화랑이란 이름으로 인사동에 문을 연 공화랑은 고미술품 기획 전시와 올바른 유통과정 확립에 힘써오며 고미술 전문 화랑으로 자리매김해왔다.

1983년부터 7년간 열어온 조선시대 회화 명품전, 문방 보품전(1986), 문방보품백선전(2000), 9인의 명가 비품전(2003) 등이 대표적인 전시로 꼽힌다.

1998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공화랑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고미술은 물론 현대미술까지 아우르며, 국내 현대미술 작가 지원에도 무게를 실어왔다. 기획전과 초대전을 기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매년 여름, 한국과 일본의 20여명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한일교류전'과 1월마다 열리는 정연택 명지전문대 공예과 교수의 '도자기 전시'가 대표적인 작가 지원의 일환이다.

북경의 공화랑(대표: 공문영, 2006년)은 미국 메릴랜드 대학과 북경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공창호 대표의 둘째 딸이 운영하고 있다.

한국의 화랑 중 최초로 중국에 진출했으며 근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 간 예술 교류의 장으로 자리잡아오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