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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 여성으로 살아내기
[영화 속 미술이야기] 영화 <화혼>과 중국최초 여성유화가 판위량
실력있는 화가 '여성'이라는 멍에와 굴레에 갇히다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



서세동점의 근대기는 동양 사람들에게 충격이자 고통이었다. 미처 적응할 틈도 없이 밀려든 새로운 문명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특히 이러한 격동기에 ‘남존여비’라는 보수적인 전통에 젖어 살아야 했던 중국이나 한국의 여성들에게 근대화란 실로 처절한 이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끌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 나온 이를 들라면 우리 근대사에서는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로 잘 알려진 화가 정월 나혜석(1896~ 1948)을 떠 올리게 된다. 그리고 이에 버금가는 여성을 중국에서 찾는다면 판위량(潘玉良, 1899~1977)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혜석이 뼈대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법도있는 가문으로 시집을 갔던 것에 비해 판위량은 양저우(揚州)의 모자장수 집 둘째로 태어났지만 그녀가 첫 돌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두 살 때 유일한 혈육이던 동생 완반을 잃고, 여덟 살 때는 어머니마저 숨을 거두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만다.

도박 빚에 몰린 외삼촌은 조카를 상해의 기방에 창기로 팔아버린다. 그 후 기생 아홍의 몸종으로 삶을 이어가던 중 남자 손님들 간의 다툼으로 주검이 되어버린 아홍을 보며 치를 떤다. 그후 상해로 부임해 온 판 짠화를(潘 贊化)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일본유학을 다녀온 반듯한 지식인이었던 그는 이미 아내가 있었지만 홀로 부임해 왔다. 그래서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급급하던 지역유지들이 옥랑의 성상납을 통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려 하고.

중국 근대여성화가 판위량의 이야기로 만든 영화 ‘화혼’(畵魂, 1993)은 중국영화 특유의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한다. 스난(石楠)이 쓴 소설 ‘판위량’을 바탕으로 장예모(張藝謀)가 극본을 쓰고 황수친(黃蜀芹)이 감독한 이 영화는 중국의 대표 여배우 궁리가 열연함으로써 중국최초의 여성유화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려내었다.

혁명당 동맹회 회원이자 세관 관리였던 판짠화와의 만남은 그녀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판짠화는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판위량을 대했다. 갈 곳 없는 판위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면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판짠화의 친구인 화가 홍야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면서 그림에 끌려들어간다.



1-누드들
2-기대누은 누드
3-판위량 자화상 69세


그리하여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판위량은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교장인 류하이쑤(劉海粟, 1896~1994), 서양화과주임교수 왕지위안(王濟遠)을 사사하면서 예술로서의 누드화를 발견한다. 이런 판위량의 재능과 노력에 감동한 판짠화는 그녀를 첩으로 맞아들이게 되고 이후 판씨 성을 갖게 된다.

이후 자식을 원하는 판짠화를 위해 아이를 낳으려하지만 이미 그녀는 석녀(石女)가 되어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라는 사실만 알게 된다. 그리하여 본처를 불러들여 아들을 을 낳게 한다. 남편과 부인 둘이 한집에 동거하는 묘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그림에 몰두한다. 그후 남편의 도움으로 상하이 미전을 졸업하고 프랑스 리용에 유학하여 리용 국립 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한다.

이후 파리 국립미술학원으로 옮겨 졸업을 하고 다시 이탈리아 국립미술학원에 진학해서 유화와 조각을 공부하며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끝내고 상해로 돌아온다. 그녀는 자신의 모교인 낸 상해미전(上海美專)에 교수로 부임하고 그후 난징의 중앙대학 미술과 교수를 자리를 옮긴다. 난징에서 네 번이나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만 창기 출신이라는 그녀의 과거는 그녀를 시새움하는 이들에게는 빌미가 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판짠화의 지위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혁명적인 역사관과 진보적인 생각을 지녔던 판짠화까지 그녀가 개인전에 자신의 누드화를 내거는 것에 반대하면서 누드 자화상을 전시하려거든 헤어지자고 까지 하면서 갈등은 깊어만 간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파리로 돌아간다.

파리에 온 판위량은 그녀의 제자이자 이루어 질 수 없는 연인이었던 텐수신의 도움으로 화가로서 프랑스는 물론 영국과 벨기에,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등지에서 전시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판위량은 나치의 프랑스 침공과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중국침략 등으로 인해 고국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20여 년간의 객지 생활 끝에 1977년 78세를 일기로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묻힌다.

물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판찬화는 이미 그녀에 앞서 저 세상 사람이 되었고. 이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작품 4000여점이 고향 안후이성(安徽省)으로 돌아오고 이후 대규모의 회고전이 수차 열렸다.

이렇게 여성으로서, 재능있는 화가로서의 판위량의 삶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동양에서 여성의 삶은 멍에이자 굴레였다. 게다가 파리에서 만난 그녀의 친구 학경의 삶까지 포함하면 여성이라는 존재의 수동적이고 종속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자유연애를 실천한 학경은 반윤리적인 인간으로 낙인찍혀 남자에게 유린당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는 중국에 돌아올 수조차 없어 이국에서 쓸쓸하게 죽어가야만 했다.

제 아무리 실력 있는 여성화가라 해도 그것은 하나의 허울 일 뿐 중국사회에서 진정으로 성공한 여성이라는 것은 오직 대를 이어주고, 남편의 수발을 드는 순종형 여성만을 의미했다.

1952년 파리 시립미술관에 ‘목욕 후’라는 작품이 소장되고 파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한다. -영화에서는 오르세이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은 오르세이 미술관은 1986년 개관했다. 따라서 그녀가 개인전을 열었던 오르세이 갤러리는 1939년부터 비었던 오르세이 역사를 갤러리로 사용하던 시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화풍은 야수파의 대가 마티스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또 누드화는 르누아르의 그것과 닮아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전통 중국회화의 리드미컬한 필선과 색채로 인해 매우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게다가 유화기법과 중국화법이 혼합되어 매우 독특하고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유색인종으로, 식민지 백성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유럽화단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점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 화가들의 한계를 다시 금 되새겨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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