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뒷마당] 젊은 시절 술값에 몰려 상금 걸린 공모전 도전시인·극작가·영화감독 꿈 이뤄

대학을 갓 졸업한 나는 친구 둘과 홍대 앞 반지하에 세들어 살았다. 나는 한 문학출판사 편집부에서 밥을 벌었고, 둘은 연출가와 극작가가 되기 위해 다시 늦깍기 공부를 시작했을 때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성 짙은 동아리의 ‘동지’였던 우리는 동거 중에도 최고의 궁합을 선보였다.

함께 영화와 연극을 보았고 유원지에도 집회현장에도 함께 나다녔다. 매일매일 어김없는 술자리로 나름의 총화를 곁들인 것은 물론이다. 문 앞이 곧바로 홍대 앞 먹자골목이었던 터라 술집의 소음과 반지하의 소음이 경계 없이 어우러졌다. 삼삼오오 각각의 친구들이 반지하로 몰려와 취기를 연장하거나 하룻밤을 신세지는 일도 흔했다.

나중에는 고향 선후배들이 서울에 터를 잡기 전에 잠시 머무는 숙소 역할까지 감당했던 터라 나름 아는 이들의 입에는 명승지처럼 오르내렸다.

하루하루가 낙원처럼 화려하기만 하였을 리는 만무했다. 총각 셋이 모여 사는 집의 꼬락서니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나는 가뿐히 타고 다녀도 좋을 만한 크기의 바퀴벌레를 처음 봤는데, 어느 날 밤엔 심지어 날아다니는 그들을 보고 백과사전을 뒤지기까지 했다.

어른 머리 높이쯤 달려 있는 창문으로 고상한 취미를 가진 주인 마님네 마당이 펼쳐졌고, 그 언저리에 주인 마님의 취미대로 갖은 식물들이 화단이라는 군락지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 식물들이 제법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알았지만 우리에게 그곳은 모기와 파리와 지네와 달팽이를 비롯한 온갖 곤충들의 서식지일 뿐이었다.

때문에 현관 입구에는 곤충과의 전쟁을 위한 대량살상무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밤새 시달린 여름 밤에는 차라리 우리가 살충제를 마시는 게 낫겠다는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하기야 그런 사정쯤이야 비슷한 시기에 상경한 시골뜨기들 중 부모세대의 특출 난 세례를 기대할 수 없는 또래들이라면 한 번씩은 거쳐가는 순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물일곱 살의 청년들이 하루하루 생산해내는 분진과 분비물과 술병과 라면봉지는 과히 반지하를 파묻어버릴 것처럼 폭발적인 증가량을 자랑했다.

빨래에 가려 세탁기는 보이지 않았고, 개수대는 씻지 않은 그릇들에 점령당했으며, 문을 열면 이쪽부터 저쪽까지 술병이 도미노를 일으키며 쓰러졌다. 간혹 빈병을 파는 것으로 학교까지의 왕복 교통비를 충당하고도 김밥 한 줄을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으니!

우리는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뎠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누군가가 드디어 나서서 청소며 빨래며 집안 정리를 했다. 우리 중 유독 인내력이 부족했던 한 명이 한두 번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불평 자리가 불러온 술자리로 인해 불평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당황케 한 일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학생이었던 둘은 신분의 특성상 술값의 상당 부분을 직장인 신분인 나의 지갑을 통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두 번은 근처 술집으로 퇴근해서는 술집 주인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 명의 출판사 초급으로 장정 셋의 술값을 다 감당한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었다. 그렇게 5개월을 살 즈음, 뉴스에서는 ‘카드대란’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하였다. 자신이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기업으로부터 단순히 신용을 담보로 가불을 받을 수도 있는 꿈 같은 시스템이, 불특정의 수많은 또래들을 사회적 불구의 굴레 속으로 몰아넣었다.

어차피 자본주의는 파산한 자와 제외된 자를 양산함으로써 유지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 잔혹한 선택과 배제의 메커니즘이 우리 셋을 나란히 경제활동 부적격자로 분류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머리를 맞댔다. 우리 앞에 닥친 이 총체적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묘책은 무엇일까. 제갈량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종 장르극을 섭렵한 우리는 실로 다양한 간구책을 쏟아냈다. 메밀묵 장사에서부터 신문 배달까지, 각자의 경험에서 호출된 모든 가능성이 고려되었다.

그러나 결국 채택된 방도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남들보다 낫거나 잘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배경이 있는 것도 집안이 좋은 것도 학벌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영어를 잘하거나 컴퓨터를 잘하거나 특출 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글조차 남들보다 못 쓴다면 우리 앞에 던져진 세상은 오밤중과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각자 공모 장르에 걸린 상금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엎드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상금으로 엄중한 시절을 극복한 사람은 없었지만, 우리는 그때 썼던 작품으로 각자의 장르에 이름을 올렸다. 나는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시인이, 류승진은 클레르몽 페랑 국제영화제 출품으로 영화감독이, 백하룡은 서울연극제 희곡상을 받으며 극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각자 책을 내고 장편영화를 찍고 연극을 올리는 사이 10년이 지났다. 걷고 싶은 거리가 조성된 홍대 앞에는 판자로 얽은 먹자골목의 모습대신 깔끔한 간판들이 들어섰다. 우리에게는 사적지라도 불러도 좋을 반지하 아지터는 감자탕집이 되었다.

우리는 가끔 감자탕을 뜯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새삼스런 이야기는 아니다. 재주가 좋아 먹고 살다 보니 문학을 하게 된 사람들도 많지만, 먹고 살기 위해 문학을 하게 된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먹고 사는 일과 문학을 나란히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작가들에게 에피소드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신용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