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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아트, 스스로 운명을 점치다
미디어아트프리즘 / 제프리 쇼의 '웹 오브 라이프'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





웹 오브 라이프


관상학하면 대부분 얼굴이나 외모를 통해서 사람의 운명을 내다보는 점술의 일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관상학은 이러한 통념과는 달리 예술사에서만큼은 적어도 매우 현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가령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잔더(August Sander)의 초상 사진들이 관상학(physiognomy)적 특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물론 이때 관상학이라는 말은 사람의 운명과 관련짓는 점의 일종으로 보려는 우리의 어감과는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벤야민이 잔더의 초상 사진에서 발견한 특성은 잔더가 그 이전의 사진가 혹은 화가들과 달리 인물의 지극히 개인적인 용모나 특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전의 화가들이나 사진가들은 초상화를 그릴 때 개인의 용모 자체에 앞서서 그 인물의 사회적 지위나 계급, 성별 등을 고려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뜻이다. 가령 귀족부인을 사진으로 찍을 경우 그 부인의 개별적 용모를 고려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사진가 혹은 화가는 그녀의 귀족적 특성을 드러내는데 관심을 둔다.

이럴 경우 그녀의 이미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귀족의 보편적 특성에 종속이 되고 만다. 벤야민이 보기에 잔더의 초상화는 그러한 보편적 특성을 무시하고 순수하게 인물의 용모만을 드러낸다. 관상학이라는 명칭은 바로 이렇게 용모 자체에만 주목하는 관찰 태도를 나타낸다.

이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관상학과 정반대이다. 관상학이 한 개인의 용모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미리 주어진 어떤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이때 관상은 분명히 유형화된 것이며 개인의 운명을 미리 좌우하는 결정론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벤야민의 관상학은 정반대로 개인의 사회적 지위, 성차, 계급 등 개인을 결정짓는 어떠한 요소도 배제하고 순수하게 한 인물의 개별적인 용모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의 관상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관상학과는 정반대로 철저하게 비결정론적이며 우연적인 특성을 지닌다.

벤야민의 동료이면서도 묘한 라이벌의 긴장관계에 있었던 아도르노 또한 관상학이란 말을 자신의 음악이론을 집약하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음악은 그의 철학이론에서 핵심을 이루는 영역이다. 아도르노는 음악이 문학처럼 명시적인 언어로 예술가의 이념을 표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제약을 지닌 음악이 문학과 달리 어떤 위대한 이념을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내용이 아닌 형식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은 그 자체가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음악적 형식이 인간의 귀에 하나의 형언할 수 없는 용모(관상)를 띠게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용모는 직관을 통해서 우연한 계기에 섬광처럼 얻어지는 것이므로, 아도르노 또한 관상학을 통하여 결정론적 견해를 피해갈 수 있었다.

전통예술과 비교하여 미디어아트가 지닌 장점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상호작용’ 혹은 ‘비결정론’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극히 상식적으로 예상할 수 있듯이, 동시에 미디어아트는 테크놀로지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된다.

미디어아트의 세계에서는 이미 고전이자 신화가 되어버린 제프리 쇼(Jeffrey Shaw)의 작품 ‘웹 오브 라이프’(Web of Life)는 바로 미디어아트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다.

독일의 칼스 루헤에 위치한 ZKM(예술과 미디어를 위한 센터) 2층에 상설 전시된 이 작품은 간단한 인터페이스와 스크린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이 전시된 방으로 관객이 들어서면 우선 벽면의 큰 스크린 앞에 놓인 인터페이스 장치가 눈에 띤다. 사람의 손 모양으로 된 인터페이스에 손바닥을 대면 스캐너가 관객의 손바닥 표면을 스캔한다.



1-웹 오브 라이프
2, 3, 4-어거스트 잔더의 초상사진


이때 스캐너가 스캔하는 것은 관객의 손바닥에 새겨진 손금이다. 스캔이 끝나면 받아들여진 정보에 맞추어 스크린에 다양한 3D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관객의 손금에 따라서 다른 형태로 주어진다.

손금은 손의 관상, 즉 수상을 결정하는 요소다. 일종의 관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제프리 쇼의 작품에서 손금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결정론적 요소를 나타내기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심지어 같은 손을 두 번 댈 경우에도 반드시 똑같은 이미지들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작품의 제목처럼 삶의 다양한 얽힘이다.

순수한 의미에서 웹은 마치 풀 수 없는 실타래의 얽힘처럼 복잡하고 우발적인 것들의 중첩이다. 이 작품은 미디어아트가 전통적인 예술작품에서 구현할 수 없었던 복잡하고 우발적인 만남을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벤야민적 의미에서 관상학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이 작품은 그러한 기대와는 다른 미디어아트의 우울한 전망을 암시하는 면도 있다. 이 작품의 인터페이스 장치인 스캐너가 읽어 내는 관객의 손금은 순수한 용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관객의 손금은 이미 알고리즘 장치에 의해서 유형화되어 있으며, 이러한 유형화에 따라서 한정된 3D 화면들이 조합되어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1967년도에 등장하였던 최초의 인터렉티브 영화인 ‘키노 아우토마트’의 결정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는 관객이 두 개의 장면 중 어느 하나를 임의대로 선택하여 영화를 자신의 임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국은 동일한 경로에 이르게 될 뿐이다.

제프리 쇼는 이러한 결정론적 한계를 테크놀로지 자체의 한계와 동일시한다. 말하자면 기술적 한계가 제한된 경우의 수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 미디어아트가 이러한 결정론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확신할 수 있는 어떠한 논리적 근거도 없다.

미디어아트가 결정론을 벗어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 자체가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품은 비결정론적인 관상학과 결정론적인 관상학 모두를 담고 있으며, 관객의 운명이 아닌 미디어아트 자체의 운명을 점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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