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억 사이에는 공백이 있다. 기억은 결코 원형 그대로 재생할 수 없다. 현재의 판단이나 상상력이 끼어들어 기억을 각색하거나 왜곡하기도 하고, 나쁜 기억은 망각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기억의 간격, ‘나’는 그 사이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일관되게 ‘기억’을 주제로 이야기해온 작가가 있다. 얼룩과 번짐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동양화가, 서윤희. 그녀가 ‘기억’을 재생시키는 과정은 소란스럽거나 번잡하지 않은, 고요함 속에서 인내하는 과정. 다양한 약재, 차 등을 우려낸 물로 종이(한지)를 찌고 말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여 나타나는 얼룩을 통해 삶의 흔적을 표현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로 작가는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익명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등장시키며 심상의 간격을 시각화한다. 그녀가 선택한 약재나 차 등 우리네 삶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한국적 소재는, 기억 속의 상처를 소독하고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얼룩덜룩한 화면 속에 점점이 그려진 사람들과,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정형의 얼룩은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선 듯한 느낌을 준다.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5월 26일부터 6월 13일까지. 02)51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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