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파워갤러리] (8) 이목화랑대구서 서울로 이전 천경자·권옥연·변정하 화백등과 각별한 인연임경식 대표 KIAF 창립·미술감정에 필요한 자료 아카이브 구축성과

(좌) 이목화랑 임경식 대표 (우)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이목화랑은 1976년에 오픈했으며, 임경식 화랑대표는 대구 출생으로 3년간 약국을 경영했으며 그림에 애착을 갖던 와중에 주위 화가의 권유로 화랑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구는 서울 다음가는 문화도시로 꼽힌다. 예술서적 판매율도 그렇거니와 매년 국제 오페라 페스티벌과 뮤지컬 페스티벌, 그리고 대구 아트페어, 아트 대구 등 두 개의 미술행사가 꾸준히 열리는 것만 보아도 대구 시민들의 문화에 대한 욕구와 갈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목화랑의 임경식 대표가 대구에서 처음 화랑을 시작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동떨어진 건 아니었을 거다. 고향인 대구에서 약대를 나왔지만 3년간의 약사 경험은 그에게 그다지 좋은 추억거리는 아니다. 친구 소개로 대구 출신 화가들의 작품 한두 점씩 사서 감상하는 것은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취미였다.

“약국 밖에서 보면 그럴 듯 해보이지만 본인은 얼마나 괴로운지 몰라요. 제가 약국을 하던 1970년대 초반에는 경쟁이 심해서 주말에도 쉬지 못했거든요.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줄곧 약국을 지켜야 했지요. 영화를 좋아해도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도무지 볼 방법이 없더군요. 허허”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직장인들이 퇴근하는 저녁시간대에는 편히 앉아 식사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회의가 몰려오던 중 친분이 있던 화가의 제안에 화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국민 소득의 향상으로 유망하다는 설명이었지만 임 대표는 화랑이 약국처럼 하루 종일 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가장 끌렸다고 했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벌써 34년을 관통하고 있다.

1976년 개관 이후, 1990년 서울 청담동으로 옮겨온 후엔 지금껏 이곳을 지켜왔다. 지금은 20-30개의 화랑들이 밀집되어 있어 제2의 인사동이라 불릴만한 청담동. 당시에도 조선화랑, 박여숙 화랑, 샘터화랑, 가산화랑, 유나화랑 등이 있어 그런 분위기가 차츰 형성되고 있었다. 덕분에 1992년부터는 꾸준히 청담 미술제를 열어오고 있다.

이목화랑의 기획전과 초대전, 그리고 매년 생일상처럼 차려지는 개관 기념전을 통해 임 대표가 만나온 화가들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양화가들이다. 권옥연, 변정하, 윤중식, 박창돈 화백이 각별하지만 여류화가 천경자 화백은 그에게 진정한 예술가의 면모를 몸소 보여준 존재이다.

“천 선생님이 화랑 근방에 사셔서 자주 점심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대를 피우곤 댁으로 들어가셨지요. 진정 자신의 작품을 사랑한 예술가세요. 많은 화가를 만나도 그런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을 것 같은. 생활비가 떨어졌다거나 해외에 나가야 한다거나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작품도 잘 팔지 않으셨어요. 자식 팔아먹는 느낌이어서 그렇다고 하시더군요.”

천경자 화백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25년 동안 교류하면서 임 대표는 일 년에 한 점씩 작품을 받았다. 세 작품을 출품하면서 두 작품은 반드시 돌려 달라고 부탁했고 임 대표도 그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이후 천경자 화백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93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임 대표는 화랑을 운영하면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화랑협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이제는 대표적인 국제적인 미술교류의 장으로 자리 잡은 KIAF(한국국제아트페어) 창립과 미술 감정에 필요한 자료의 아카이브 구축은 그가 재임할 당시 일군 굵직한 두 가지 일이다. KIAF에는 20년 이상 이어온 화랑미술제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문화관광부의 지원도 설득을 통해 끌어올 수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이 좋은 자극제가 됐어요. 2000년 이후에 많은 외국작가들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미술계에는 국제적인 행사가 전무했거든요. 해외 작가도 소개하고 또 반대로 우리 작가가 해외에 소개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사여서 문광부를 설득해 1억이라는 상징적인 예산을 지원 받았습니다. 마침 세계적으로도 국제 아트페어 붐이 일기 전이라 호기였고 화폐 가치도 일본과 중국의 중간 지대여서 적당해보였지만 화랑협회 회원들 1/3이 반대를 했습니다.”

일본에는 이미 아트페어가 있었지만 2년마다 열려서 활성화되지 못했고 호주 역시 부스를 무료로 제공하겠다며 화랑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회원들의 우려가 적지 않아 문제가 생기면 임 대표가 모두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하고 KIAF 준비에 착수했다.

13명의 운영위원이 갹출한 돈은 종자돈이 되었고 월드컵 조 추천을 했던 부산 벡스코에서 1회 막을 올렸다. 2회부터 서울 코엑스 인도양 홀에서 진행해 올해로 8회째 맞는 KIAF는 정부의 지원과 기업의 후원이 늘었고 참여의사를 밝히는 해외 화랑도 많아 심사를 할 정도가 되었다.

“2003년에 위에민준의 100호 작품이 KIAF에서 5천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20억이에요. 눈 밝은 사람은 횡재했을 겁니다.(웃음) 또 우리 작가 김동유 화백은 100호에 1천만 원이었지만 2년 전 홍콩 아트페어에서 1억 5천에 작품을 판매를 했지요. 미술 교류에 KIAF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돈 버는 기술이 없어 화랑을 통해 많은 돈을 벌지 못했다며 웃는 임 대표에게 KIAF창립은 그 무엇보다 큰 보람인 듯했다.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를 판매하기 위해 방한했을 당시, 90세의 조각가 세자르(올림픽 공원에 설치된 거대한 엄지손가락의 작가)와 소피 마르소가 수행한 것이 놀랍고도 부러웠다는 임경식 대표. 세계적인 작가를 가진 나라의 자부심은 적극적인 투자 없이 얻을 수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목화랑


대구에서 1976년 개관한 이목화랑은 1990년 서울 청담동으로 이전해 터를 닦았다. 천경자, 권옥연, 주태석, 백순실, 안창홍, 임효 등 국내 원로작가와 중견작가들의 기획전과 초대전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화랑미술제와 KIAF, 아트 대구, SIPA 등에 꾸준히 참가하고 있으며 아트 컨설팅을 통해 제주도 서귀포 리조트, 강남구 노보텔 앰버서더, 이비스앰버서더 호텔 등에 조형물과 미술품을 설치해왔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