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미술의 하모니] (12) 재클린 뒤 프레와 프리다 칼로엘가 첼로 협주곡·자화상 등 통해 비운의 인생 직설적으로 표현

1-프리디 칼로와 디에고
2-프리다 칼로 '다친 사슴'
3-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4-뒤 프레와 바렌보임
5-뒤 프레의 연주

정열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와 혼신을 담은 화가 프리다 칼로.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이들의 직업과 결코 쉽지 않았던 이들의 삶, 그리고 그 삶을 열정과 고통으로 살아가다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을 한 두 여자의 인생. 그들은 우리에게 작품과 연주를 통해 그들의 고통스러웠던 삶과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연주와 작품은 모두 상당히 직설적이며 감정표현에 있어 대담하다. 엘가를 연주하는 뒤 프레의 빠른 비브라토와 현을 파고드는 소리는 마치 죽음의 고통을 드러낸 듯 절규한다.

곡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한치도 거침 없었던 그녀의 연주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데 칼로는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듯 피 흘리는 전신, 온 몸에 박힌 못과 화살 등 참혹스러운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듯 과감하고 적나라한 표현은 이들의 삶에 대한 열정과 고통을 보여준다.

재클린 뒤 프레 하면 떠오르는 그녀의 혼신을 담은 엘가 첼로 협주곡의 전설적인 연주는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우리 모두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녀의 연주를 한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은 소름 끼칠 정도로 혼을 울리는 그녀의 소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녀의 연주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열정과 에너지를 담고 있다. 엘가 첼로 협주곡은 엘가의 후기 작품이며 기존 스타일과는 확연히 차별되는 곡으로 고뇌, 절망, 죽음, 그리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 등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뒤 프레의 절규하는 듯 슬픔에 넘치는 연주는 다가올 그녀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여 더욱 더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뒤 프레는 어렸을 때 그녀의 언니인 힐러리에게 종종 “나는 이다음에 크면 전신마비가 걸릴 것 같아” 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올 비극을 어렸을 때부터 예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근육이 천천히 마비되어 죽게 되는 다중경화증이라는 병에 걸려 화려했던 연주생활을 중단하고 15년간 투병을 하다 4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친 그녀의 삶은 멕시코의 비운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삶만큼이나 슬픔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프리다 칼로는 뒤 프레와 마찬가지로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녀의 오른쪽 다리는 어렸을 적 소아마비로 인하여 왼쪽 다리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얇았다. 그녀가 18세가 되던 해 그녀는 척추, 쇄골, 갈비뼈, 골반이 부러지고 오른쪽다리는 11군데가 골절되며 오른쪽 발은 짓이겨지는 극심한 교통사고를 당한다.

또한 사고 당시 쇠 파이프가 그녀의 복부와 자궁을 뚫고 나가는 심한 부상을 입는다. 이로 인해 그녀는 평생 동안 서른 다섯 번이라는 참기 힘든 수술을 거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 대형 사고는 그녀를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심한 부상으로 학교에도 갈 수 없었던 칼로는 그녀의 아버지가 천정에 붙여 준 거울을 보고 침대에 누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녀의 작품 중 3분의1에 해당하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혼자 있을 때가 많고 따라서 내가 제일 잘 아는 주제는 나이기 때문에 자화상을 그린다” 라고. 그녀의 자화상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변한다.

그녀는 특히 사고에 따른 잦은 유산으로 상처받은 아픈 마음을 적나라하고 다소 충격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초현실주의라고 평가한 것에 대해 "나는 절대 꿈이나 악몽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해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뒤 프레의 무리한 연주 스케줄에 따른 우울함과 몸이 마비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칼로의 대형 사고로 인한 잦은 수술과 이로 인해 반복적으로 경험한 유산의 아픔, 술과 담배 없이는 견딜 수 없었던 고통은 그들의 절규하듯 슬픈 연주와 그림에서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아픔을 그리고 연주했던 재클린 뒤 프레와 프리다 칼로의 또 다른 공통점은 그들의 순탄하지 않았던 결혼생활에 있었다. 뒤 프레와 칼로 모두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는 남편을 만나 몹시 사랑하여 결혼하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그들을 더욱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뒤 프레는 지휘자 다니엘 바램보임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성공을 향한 욕심에 따른 무리한 연주 스케줄과 연주에 있어 한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남편의 요구로 인해 뒤 프레는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무렵 그녀는 한동안 그녀의 언니 힐러리의 동의 아래 힐러리의 남편 즉, 그녀의 형부와 연인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양성애자였던 칼로 역시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 디에고와 결혼을 했는데 그녀는 남편 이외의 남자뿐만 아니라, 동성들과의 외도로 디에고의 질투심을 사곤 했다. 한편 남편 디에고는 칼로의 여동생과의 외도로 칼로를 심한 충격에 빠뜨리기도 했는데 디에고의 아이를 몹시 가지고 싶어했던 칼로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고 그녀의 반복된 유산은 그녀를 더욱 더 심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평범하지 않았던 그들의 사랑과 인생, 그들은 50년이 채 안 되는 인생을 고통 속에서 마감했다. 뒤 프레는 1973년 마지막 연주 후 14년 동안 서서히 근육이 마비되는 고통스러운 병과 싸우다 급기야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1987년,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칼로는 1953년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끝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거치고 두어 번의 자살시도 끝에 심한 폐렴으로 47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사인은 약물과용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가 쓴 마지막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고 한다.

"내가 떠나는 이 길이 기쁨이었으면…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기를…"




노엘라 violinoella@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