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결합, 윤리적 패션 등 영역 확장 포문 열어

# 어린 아이들이 슈퍼맨과 배트맨, 스파이더맨을 소환한 꿈의 지구 방위대를 상상한다면, 어른들은 NBA 최고의 선수들을 모아 드림팀을 꾸리는 것으로 그 꿈을 실현시킨다. 더 강하고 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럽고도 집요한 욕망은 최고의 하이브리드를 창조하는 데 꼭 필요한 원동력이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패션 관련 크로스 장르 전시는, 국내에서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떼는 단계다. 옷장 안에 갇혀 있던 옷에 세상의 모든 것들이 유혹의 손짓을 보냈고 거절할 이유가 없는 패션은 그 손을 잡았다. 패션이 미술에 답하고 윤리가 패션에 질문하면서 단순히 입는 것에 머물렀던 패션은 보는 패션, 말하는 패션, 꾸짖는 패션으로 스스로 세포 분열을 시작했다. 크로스 장르의 볼 거리는 영역의 확장뿐이 아니다.

상상해보라. 우리 시대 가장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합법적으로 서로의 상상력을 훔칠 기회를 준다면 그들은 어떤 결과물을 보여줄지. 경기도 미술관에서 열리는 ‘패션의 윤리학-착하게 입자’ 전과 고양아람누리 미술관에서 열리는 ‘패션과 미술의 이유 있는 수다’ 전에서 그 전조를 볼 수 있다.




패션과 미술의 이유 있는 수다

2009.07.18 ~ 09.27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영국의 팝 아티스트 데미안 허스트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뿌리고 돌려 원심력으로 흩어버린 작품 <스핀>을 리바이스 청바지 위에 입히면서 말했다.

“Art you can wear”

자신의 작품을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입었으면 한다는 그의 바람은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에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그 발언은 미술과 패션의 경계가 어느 정도까지 허물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전시의 한 축은 작가들의 감성을 적극적으로 흡수해 온 패션 하우스들의 아트 워크로 꾸며졌다. 이미 언급한 리바이스가 대표적인 케이스로 데미안 허스트의 <나비>와 <스핀>은 각각 데님 재킷의 안감과 데님 팬츠 위에 입혀졌다. ‘악어 백’ 콜롬보는 자그마치 3년 전부터 국내 작가 7인과의 콜라보레이션을 기획해 왔는데 이번 전시에 그 중 한 점이 미리 공개 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가방 제작 시간과 작가들의 작업 시간, 또 이탈리아 본사의 확인을 받는 시간 중 어느 것도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김혜숙 작가는 콜롬보 가방 위에 금색의 나비를 그린 것뿐 아니라 악어 가죽을 활용해 누워 있는 듯한 악어 모양 오브제를 선보였다. 작가들에게 재해석된 콜롬보의 새로운 모습은 11월경 공개될 예정이다.

꾸준한 예술 사랑을 보여주는 국내 기업으로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쌈지도 빠지지 않았다. 한국의 젊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예술이 세상을 치료한다’는 콘셉트로 진행하는 캡슐 티셔츠프로젝트는 작가들이 디자인한 티셔츠를 캡슐 모양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아 판매했다.

전시를 이루는 또 다른 축이자 주목해야 할 분야는 국내 패션 디자이너들과 순수미술 작가들의 협업이다. 이상봉, 이영희, 장광효와 박선기, 박승모, 이연미 등이 만나 서로의 창작력을 공유했다.

이런 식의 작업에는 어쩔 수 없이 디자이너와 작가 간의 긴밀한 관계가 중요해진다. 전시회 측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만남도 의미가 있지만 평소 서로의 작품 세계에 팬을 자처하는 입장이었다면 그 만남에서 파생될 결과물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 이상봉과 조각가 박승모는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로 유명하다. 이상봉의 드레스에 반한 박승모에게 이상봉이 무상으로 작품을 기증했고 박승모는 자신의 특기인 금속선 작업을 통해 이상봉 드레스의 섬세한 주름까지 다시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만들자마자 해외로 팔려나가 전시회에서는 볼 수 없었다) 이번 전시에는 인체의 굴곡을 금속선으로 묘사한 박승모의 작품에 이상봉의 09 F/W 의상을 입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젊은 작가들끼리의 만남도 흥미롭다. 디자이너 하상백은 이연미 작가 특유의 화사하게 채색된 잔인함에 푹 빠졌다. 그녀의 그림을 산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컬렉션에 그림을 프린트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 기꺼운 승낙을 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티셔츠와 바지는 이연미의 회화와 함께 나란히 전시됐다.

디자이너 정구호와 설치 미술가 박선기는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테마 아래 전시 기획자에 의해 하나의 섹션을 꾸미게 되었다.

조각가 박선기가 숯을 이용해 공간을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고 정구호는 거기서 영감을 얻어 예의 그 범상치 않은 절개법을 발휘해 옷이라는 공간을 재해석했다. 여기에 공간을 비트는 것 같은 손몽주의 탄성 밴드와 옷의 안팎에 대한 구분을 전복시킨 홍승완의 옷이 함께 했다.

물론 우리가 보고자 한 것은 옷을 입은 조각이나 그림을 그린 티셔츠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영희의 ‘바람의 옷’이 한국의 미를 드러낸다는 이유만으로 정명조의 그림과 한 섹션에 배치되는 것, 그 이상 말이다. 패션 큐레이터이자 <샤넬, 미술관에 가다>의 저자인 김홍기 씨는 “나무라지 말자”는 말로 입을 열었다.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 시작이니 잘한 부분에 주목했으면 한다. 인체라는 3차원의 공간을 다루는 패션이 2차원의 회화와 만날 때, 단순히 입을 거리였던 옷은 사회정치적인 담론의 주체가 될 수도 있고 당대의 아픔에 대해 정서적 미감을 끌어내는 오브제가 될 수도 있다. 서로 영향력을 주고 받으면서 더욱 견고해지고 풍성해지는 상상력은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l 관람시간: 화.수.목.일 10:00am-6:00pm, 금.토 10:00am-8:00pm, 월요일 휴관.

l 문의: 031) 960-0180

1) 쌈지와 협업한 산성비의 B 브랜드. 2) 이정혜의 '동지들'. 3) 안나 파울라 프라이타스의 캔 뚜껑 가방. 4) 마크 리우의 '제로 웨이스티드 디자인'. 5) 미술 평론가 바니 정. 6) 현대 미술가 유현미의 윤리적 패션.
1) 쌈지와 협업한 산성비의 B 브랜드. 2) 이정혜의 '동지들'. 3) 안나 파울라 프라이타스의 캔 뚜껑 가방. 4) 마크 리우의 '제로 웨이스티드 디자인'. 5) 미술 평론가 반이정. 6) 현대 미술가 유현미의 윤리적 패션.
패션의 윤리학 - 착하게 입자

2009.07.23 ~ 10.04 경기도 미술관

패션의 윤리학이라는 주제는 패션의 영역 확장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세상에서 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옳고 그름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야 중 하나가 패션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라는 오랜 화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아슬아슬하게 도덕성 논란을 비껴왔다.

패션 역시 신체를 압박하고 열등감을 부추기거나 끊임 없이 소비하는 이미지가 강했고,, 자연히 착함을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스타일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 아니었던가.

때문에 지금 패션이 윤리를 말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진심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설령 마케팅 전략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이다. 트렌드는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대중의 호불호를 바꾸고 결국 모두 따라오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패션 피플들에게 ‘쿨하다’ 이후로 최고의 찬사는 ‘착하다’가 될 지도 모르겠다.

전시는 윤리적 패션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동일한 가치에 동조하며 작업하는 디자이너, 건축가, 설치미술가, 사진가들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윤리적 패션이 처음 시작된 영국을 포함해 프랑스, 홍콩 등 6개국에서 총 19팀이 참여했다.

이들은 패션이 완성되는 모든 과정에서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해 윤리를 실천하고 환경을 보호한다. 버려진 천을 활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애초에 자투리 천이 나오지 않도록 완벽하게 재단한다든지, 원단을 생산하는 제3국의 인력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등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분야가 이렇게 다양하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래진다.

마크 리우는 ‘제로 웨이스티드 디자인’을 지향한다. 재단 시 일반적으로 15% 가량의 원단이 버려지는 데 그는 하나의 천 조각도 버려지지 않도록 재단을 고려한 디자인을 시도한다. 이른바 100%의 옷이다. 개리 하비는 재활용 오트 쿠튀르를 선보였다. 완성품은 극도로 화려하고 실험적인 드레스들이지만 거기에 쓰인 소재는 실컷 입다 버린 리바이스 진, 하와이안 셔츠, 잡지, 신문 등이다.

안나 파울라 프라이타스는 캔 뚜껑을 이용한 정교한 작업을 보여주었다. 3세계 인력이 정당한 임금을 받으며 제작한 가방과 드레스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캔 뚜껑으로 만든 것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국내 작가 이정혜는 <동지들>이라는 작품으로 환경 보호를 넘어선 인격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다. 옷에 몸을 맞출 것을 강요 받는 세대에게 몸에 맞추는 옷을 제안함으로써 각박해진 마음을 위로하고 어떤 체형이든 아름다울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니트와 넉넉한 실루엣으로 지어진 옷들은 입는 이들의 동지가 되어준다.

7월22일에는 전시회 개막을 기념한 특별한 이벤트가 개최되었다. <착한 옷들의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여성학자, 미술 평론가, 작가 등 각 분야의 유명 인사들이 각자 소장하고 있는 가장 착한 옷을 입고 직접 모델로 나서 패션쇼를 연 것.

벼룩 시장에서 2달러에 건진 옷, 20년 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사준 옷을 리폼한 드레스들이 등장했다. 여성학자 오숙희는 노모와 20대 딸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랐다.

세 사람 모두 오숙희 교수의 모친이 직접 만들거나 꾸며준 옷을 입었다. 미술 평론가 반이정은 피터 팬 같은 옷 차림에 스트라이다를 타고 나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로 분위기를 띄웠고, 행위 예술가 낸시 랭은 퍼포먼스의 대가답게 워킹하는 자신의 모습을 캠코더로 찍으면서 등장했다.

피날레는 현대 미술가 유현미 씨가 장식했다. 싫증 난 옷을 리폼해 입고 나온 모델들은 버려진 지구, 새로운 지구를 주제로 만든 오브제들을 수레에 싣고 런웨이를 걸었다.

착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스타일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동조할 수 없다면 우리 시대 가장 기발한 작가들이 완성한 이 아름답고 착한 패션을 보라.

l 관람시간: 10:00am~7:00pm. 6시까지 입장 가능. 관람료 무료.

l 문의: 031-481-7043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