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아트프리즘] 로봇예술인간 닮은 로봇이 주는 친숙함과 기괴함의 이중성

1-한스 벨머의 작품
2-레오넬 무라의 아츠봇
3-데이비드 헨슨의 쥘 제작과정
4-'이노센스'

2032년 음울한 지구의 미래를 다룬 일본 SF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2편인 <이노센스> (Innocence - Ghost in the Shell, 2)는 섹스용 로봇인 가이노이드가 인간을 살해한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로봇을 제작한 솔루스사는 인간의 영혼을 로봇에 주입하는 것을 금지한 법을 어기며 살아있는 소녀의 영혼을 직접 로봇에 연결시켜 제작하였다.

살인사건은 그러한 이유에서 발생한다. <아이 로봇>이나 <에이 아이>와 같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다지 낯선 스토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이 주는 충격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가이노이드의 모습 그 자체가 우리에게 왠지 모를 심리적 충격을 던져준다.

인간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인형처럼 표정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로봇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준다. 이 인형의 모습은 마치 독일의 사진작가 한스 벨머(Hans Bellmer)의 구체 관절인형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주인공 바토 형사가 서재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낼 때 그 책 표지에 ‘Hans Bellmer - The Dolls’라고 쓰여 있는 장면이 나오는 데, 이 사실을 통해서도 이러한 연상이 자의적인 것이 아님을 뒷받침할 수 있다.

한스 벨머의 관절인형은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인간처럼 사지가 움직이는 관절을 지니고 있지만 그러한 사지의 움직임은 인형을 자연스럽기보다는 매우 기괴하게 보이도록 한다.

굳이 미술 이론가 할 포스터(Hal Foster)의 설명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벨머의 이 관절인형이 ‘낯선 익숙함’(언캐니, uncanny)이라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용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드는 인간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 가장 기괴하고도 낯선 것으로 둔갑하는 이중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낯선 익숙한’이라는 괴상한 말로 번역될 수밖에 없는 ‘언캐니’의 독일어는 ‘unheimlich'이다. 이 단어는 ‘친숙한’,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등의 뜻을 지닌 ‘heimlich’라는 단어에 반대 접두어인 un이 붙은 말이므로, heimlich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이드가 보기에 정반대의 뜻을 지닌 두 단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쌍생아이다. 가장 사적이고 친숙하며 은밀한 것이 가장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이치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생뚱맞아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영화 ‘애정만세’의 주인공은 부동산에 내놓은 빈 집에 몰래 들어가서 혼자 생활한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화장품을 바르고 여자 스타킹을 신어보고 이상한 춤을 추는 등 마치 변태성욕자나 성도착증자와 같은 행동을 한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고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기이한 행동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나타나는 감추어두었던 자신의 은밀하고도 사적인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기괴한 모습은 어쩌면 자신 속에 감추어진 가장 은밀하고도 익숙한 내면의 모습일 것이다.

역겨운 행동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또 다른 주인공의 모습이며, 이는 마찬가지로 또 다른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은밀하고도 사적인 모습이 드러날 경우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역겹고도 낯선 기괴함으로 둔갑한다.

이 ‘언캐니’의 개념은 로봇 공학에도 존재한다. 로봇이란 인간과 닮은, 인간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로봇을 최대한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저 깡통모양을 한 로봇보다는 인간처럼 직립하여 걷고 얼굴과 팔 다리가 있는 로봇을 만들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인간에게 훨씬 더 호감을 줄 것이다.

하지만 로봇이 인간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지는 순간 로봇에 대한 호감보다는 불쾌감이나 기괴함의 감정이 발생한다. 그래프로 나타내자면 초기에는 인간과 닮을수록 호감도가 높아지다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호감도가 확 떨어진다. 이것이 이른바 ‘언캐니 곡선’이다.

미디어 아트에서 로봇 예술은 매우 모호한 특성을 지닌다. 로봇 예술은 로봇 자체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 만든 이미지가 로봇 예술이 되기도 한다. 데이비드 핸슨(David Hanson)의 작업은 로봇을 그저 기계가 아닌 초지성을 지니면서도 감성적 소통이 가능한 로봇을 창출하고자 한다.

장르의 특성 상 다소 공학적인 기반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그의 작업은 어쩌면 과학과 예술이라는 구분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만든 로봇 ‘쥘’(Jules)은 사람과 거의 흡사한 모양을 띠고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기보다는 ‘언캐니’해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언캐니한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친숙해진 과학기술 자체가 숨기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인간 대신 예술의 이미지를 창조하는 로봇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레오넬 무라(Leonel Moura)는 로봇을 예술작품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림을 그리는 로봇을 제작해서 회화작품을 만든다. ‘아츠봇’(Artsbot)이라는 이름의 로봇은 색과 이미지를 나름대로 분석하여 스스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지능형 로봇이다.

이 로봇은 정밀한 구상화를 그리지는 않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패턴으로 추상화를 만들어낸다. 얼핏 보면 혼란스럽지만 나름대로 매우 치밀한 아츠봇의 작업은 마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아츠봇이 아무리 무작위의 붓질을 한다하더라도 프로그램의 제약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폴록과 같은 우연적 퍼포먼스를 완전히 실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아츠봇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머릿속을 지배하는 편견으로 완전히 자유롭기 때문에 더 즉흥적이고 우발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일상적 구속과 논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던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로봇 예술은 인간이 대단한 것으로 여겨왔던 예술 행위들 자체가 특별한 어떤 것도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을 닮은 로봇은 인간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므로 언캐니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확장된 몸으로서 미디어가 갖는 피할 수 없는 특성이기도 하다.



박영욱 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