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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옷은 내가 지킨다
패션과 공간에 대한 디자이너 5인의 5가지 생각




황수현 기자 sooh@hk.co.kr





1-대학 로비에서 열린 로에베 패션쇼
2-샤넬 패션쇼에 등장한 거대한 트위트 재킷
3-회전 목마를 설치한 샤넬 패션쇼
4-레이저와 인공 눈을 사용한 존 갈리아노 패션쇼
5-만리장성에서 열린 펜디 패션쇼
6-라프 시몬스 패션쇼


음식을 만드는 이들은 기어이 푸드 스타일링에 손을 뻗친다.

“한 가지만으로는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리사와 푸드 스타일리스트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거든요”

품 서울의 오너 셰프 노영희 대표의 말처럼 내가 만든 자식 같은 음식들은 누가 예쁘게 담아준대도 불만이다.

모든 글 쓰는 이들은 약간의 착각에 젖어 산다. 뇌수를 쏟아 붓다시피 심혈을 기울인 글들은 제 눈에는 자음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고슴도치 새끼들이라 어떤 레이아웃 속에 집어 넣어도 마뜩치 않은 것이다.

하물며 패션이랴. 모든 비주얼 산업 중에서도 가장 탐욕스럽게 시각 이미지를 소비하는 패션에서 공간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샤넬이 무대 한 가운데 초대형 트위드 재킷 모형을 설치하고 때로는 아예 파리 깡봉 거리의 매장을 통째로 옮겨 놓는 이유는 계속되는 2.55 백의 가격 인상으로 돈이 남아 돌아서가 아니다.

몇 달 전 끝난 09 A/W 패션위크에서는 쇼 장의 다변화가 인상적이었다. 디자이너들은 밀라노의 피에라, 파리의 루브르, 뉴욕의 브라이언트 파크를 벗어나 대학 로비, 공립 도서관, 텐트, 수영장 등 자신의 옷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패션쇼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덕분에 기자, 바이어 등 패션 관계자들만 하루 종일 발이 부르트도록 고생을 하긴 했지만 우리의 현실에 비교한다면 행복한 고민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패션쇼는 대부분 학여울 역에 위치한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판에 박힌 장소가 싫은 몇몇 디자이너들이 주차장, 한강, 창고로 파격을 시도해보지만 벽에 부딪히기 일쑤다. 패션쇼 허가에 인색한 관공서와 디자이너들의 평균 수입을 훨씬 웃도는 대여 비용을 해결한다고 치더라도 빠른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서울의 교통을 보고 있자면 제 아무리 최고의 비주얼을 향한 의욕으로 활활 불타던 디자이너도 슬그머니 포기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밀라노나 파리는 30~40군데에서 쇼를 한 다고 해도 모두 1시간 안으로 이동이 가능해요. 하지만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기업이 나서서 디자이너들을 스폰해주는 문화도 없으니 장소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선택권은 거의 없다고 봐야 돼요.”

서울컬렉션을 비롯해 국내 패션쇼의 대부분을 디렉팅하는 ‘더 모델즈’ 정소미 대표의 말이다.

“서울무역전시장 외에 종합운동장이라든지 인근의 시설을 패션쇼 장으로 개방해 이원화 시키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예산은 적고 교통은 복잡한 서울에서 그나마 쇼장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서울은 답답하다. 패션을 하기에는 더 답답하고 짜증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옷이 놓이는 장소라면 끝까지 눈을 못 떼는 고집스런 디자이너들이 있다.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디자이너 5인이 답답한 서울 하늘 아래에서 최고의 패션쇼를 상상했다.

질문


1. 서울무역전시장, 호텔 등 일반적인 패션쇼 장소 외에 이색적인 장소에서 쇼를 한 적이 있나?

2. 그 장소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3. 이색 패션쇼에서 벌어진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달라.

4. 패션에 있어서 공간은 어떤 중요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나?

5. 국내와 해외를 통틀어 지금까지 패션과 공간이 가장 훌륭하게 어우러졌다고 생각한 쇼는?

6. 현실이든 가상이든 자신의 옷이 놓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공간이 있다면? 또 그 이유는?






7-클럽에서 열린 송혜명 컬렉션
8-서울역사에서 열린 이상봉 컬렉션
9-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홍승완 컬렉션
10-주차장에서 열린 서상영 컬렉션
11-클럽에서 열린 최범석 패션쇼


● 이상봉 Lie sang bong

1. 많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구 서울역사에서 한 적이 있고 스파(SFAA) 그룹에서 국립극장과 시립미술관에서 쇼를 연 적이 있네요. 디자이너가 그룹을 벗어나 개인적으로 쇼를 여는 건 서울에선 상당히 어렵습니다. 200명 안팎의 살롱쇼라면 모를까요.

2. 옷의 콘셉트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비용과 허가 여부죠. 해외의 돈 많은 패션 하우스들은 한 번의 컬렉션에 몇 억을 쓰기도 하지만 국내 디자이너들 중 그럴 여건이 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3. 파리 컬렉션을 루브르 박물관에서 연 적이 있는데 임대료만 5천만 원 정도라 놀랐습니다. 음향 시설이 마련돼 있어서 추가 비용이 없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죠.

4. 장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단언컨대 30% 정도입니다. 물론 무대 장치를 포함해서죠. 우리 나라도 장소의 다양성에 대해 말할 때가 왔습니다. 너무 규모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섬유센터라든지 카페 같은 곳도 좋은 대안이 되겠죠.

5. 파리는 패션쇼에 관대한 도시입니다. 창고, 학교, 교회 모든 곳이 패션쇼의 장소가 되죠. 도시가 오래 되다 보니 클래식한 댄스 홀 같은 곳도 있는데 그곳에서 열린 컬렉션이 아주 좋았습니다.

6. 흔한 곳도 발상의 전환을 통해 얼마든지 새로운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코엑스는 패션쇼를 자주 여는 곳이지만 로비를 패션쇼 장소로 개방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천장이 높아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허가가 난다면 이곳에서 해보고 싶네요. 호텔도 마찬가지예요. 항상 하는 홀 말고 호텔 복도에서 한다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 홍승완 sweet revenge

1. 구 서울역사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컬렉션을 한 적이 있습니다.

2. 기존의 쇼장 말고 뭔가 의미 있는 곳을 찾다가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구 서울역사는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고 박물관은 소중한 문화 유산들이 보관돼 있는 곳이라 의상의 클래식함과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3. 아무래도 국가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허가를 받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쇼를 할 경우 어떤 식의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지를 설득해야 했죠. 박물관에서 쇼를 한 날에는 공교롭게도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특수효과처럼 보여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4. 패션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옷은 사람이 입는 것이고 사람은 항상 공간 속에 있죠. 건축과 패션은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생리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5. 당장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외국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패션을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무척 다양하죠.

6. 한번은 남산 3호 터널이나 1호 터널에서 컬렉션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어둡고 긴 통로는 정말 신비롭지 않나요? 색다른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적격일 것 같아요. 물론 교통이나 허가 같은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요.

● 서상영 suh sangyoung

1. 수도 없죠. 극장, 건물 옥상, 야외 주차장, 빈 건물, 온라인까지. 오히려 공식 쇼장에서 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네요.

2. 비주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욕심이라고 보면 됩니다. 판에 박힌 장소로는 원하는 그림을 만들 수 없으니 색다른 곳을 찾아 헤맬 수 밖에요. 서울이라는 테마로 컬렉션을 했을 때는 옷들이 서울 하늘 아래에서 보여졌으면 하는 마음에 야외 주차장을 섭외했었습니다.

3. 패션쇼를 위해 지어진 장소가 아니라면 사고의 연속일 수 밖에 없어요. 구조물이 손상되고 화장실은 더러워지고… 주차장에서 했을 때는 여름이었는데 당연히 백 스테이지가 없어서 냉동차를 빌려 그 안에서 옷을 갈아 입었어요. 휑한 주차장 한 켠에 서 있는 냉동차도 의외로 괜찮은 그림이던데요?

4. 뭐가 닭이고 달걀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장소는 중요합니다. 패션쇼의 내용을 바꿔 버릴 때도 있죠. 얼마 전 온라인으로 선보인 컬렉션에서 모니터의 사양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전체적으로 채도를 높인 것이 좋은 예인 것 같네요.

5. 누구의 쇼였는지는 모르지만 숲에서 모델들이 간격을 뚝뚝 벌려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대단히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해외에서는 상당히 실험적인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시도되는데 호수 위에 모델들이 옷을 입은 채 둥둥 떠 있기도 하고 백화점 쇼윈도나 거리의 전화 박스 안에 들어가 있기도 해요.

6. 한강시민공원 잠원 지구에 보면 하프 파이프라고 스케이트 보더들이 묘기를 부릴 수 있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위로는 하늘이 펼쳐져 있고 한강 다리가 가로로 지나가죠. 아주 도시적이고 젊은 분위기라 제가 원하는 콘셉트와 정확히 들어 맞았는데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패션쇼는 문화 이벤트이기 전에 상업 활동이라는 것이 이유였죠.

● 송혜명 dominic’s way

1. 클럽에서 두 번, 구 서울역사에서 한 번 했어요.

2. 장소를 선택하는 기준은 항상 브랜드의 콘셉트예요. 도미닉스 웨이의 자유로움이 공간에서도 느껴져야 하니까요.

3. 클럽에서 패션쇼를 했을 때 현장 분위기는 참 좋았어요. 다만 공간이 협소해서 관람객들이 편하게 보기가 어렵고 사진을 찍어도 예쁘게 안 나와 속상하더라구요.

4. 공간이나 배경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지지하는 버팀목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옷이지만 배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힘이 빠져요. 음악도 같은 맥락이구요. 국내에서는 거의 한 장소에서 계속 하다 보니 디자이너들 성에 안 차기도 하고 그때그때 무대 장치를 만들고 뜯어내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해요.

5. 마틴 마르지엘라가 구립 수영장에서 S/S 컬렉션을 연 적이 있는데, 수영장의 청명한 느낌이 마틴의 단정한 옷들과 아주 잘 어울렸어요. 디젤은 홀로그램으로 물고기 모양을 쏘아서 공간을 아예 쇼의 일부로 만드는 혁신적인 시도를 했었죠. 그게 하도 멋져서 한동안 홀로그램 장치를 알아 보고 다녔는데 국내에서는 기술 문제 때문에 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6. 지금 브랜드를 정비하는 중이에요. 포인트 컬러를 자제하고 블랙 & 화이트를 늘리고 있는데 벽과 천장, 바닥이 모두 블랙으로 이루어진 클럽이나 카페에서 저의 새로워진 옷들을 선보이고 싶어요.

● 최범석 General Idea

1. 대부분 색다른 장소에서 했던 것 같아요. 세 번째 컬렉션을 홍대 클럽에서 했었고 리틀엔젤스 회관에서도 한번 한 적이 있네요.

2. 클럽의 경우 당시 콘셉트가 집시였어요. 보헤미안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모델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는 퍼포먼스를 했었죠. 이런 부분은 아무래도 공식 쇼장에서는 제한을 받을 테니까요.

3. 저도 구 서울 역사에서 패션쇼를 한 적이 있는데 장소 자체는 참 멋있었지만 워낙 오래 방치되었던 곳이라 냄새가 심하고 노숙자들이 돈을 요구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는 후문이 있었어요.

4. 옷만 보여주겠다는 디자이너는 반주 없이 노래하겠다는 가수예요. 목소리만 좋다고 전부는 아니죠. 장소가 주는 즐거움이 있어요. 옷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지만 조명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고 무대를 보러 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5. 라프 시몬스가 파리의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옥상 바로 아래층에서 컬렉션을 연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마침 시간도 에펠탑이 점등하는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서 시작한 거에요. 쇼가 늦어진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그 화려함에 다 입을 다물었던 기억이 있어요.

6. 서대문 형무소를 가봤는데 너무 괜찮더라구요. 하지만 프랑스와 달리 우리 나라는 패션쇼 장소 협찬에 관대한 편이 아니에요. 가상의 공간을 떠올리자면 이집트 같은 이국적인 장소에 한 1만년 전부터 형성된 시장에서 하고 싶어요. 제 옷은 컨템포러리에 가깝지만 세월의 힘이 느껴지는 이런 장소와 역설적으로 잘 어울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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