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 초대전] 디아스포라적 재생, 지역, 정체성 담긴 작품들미술작업은 구도의 길

요즘 미술계의 주목할 만한 전시 중 하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태어난 터전을 떠난 이들의 작품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조명하고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이달 16일까지 열리는 <미국 속의 한국작가 11인 For Excellence: The 11 KAFA Awarded Artists> 전과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9월 27일까지 전시하는 <아리랑 꽃씨> 전이 대표적이다.

인사동 장은선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재미 서양화가 이승(Seung Lee)의 작품전은 그러한 전시의 연장에 있으면서 또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승은 이민 1.5세대로 미국 볼티모어 Maryland Institute 미술대학에서 드로잉을 전공하고 뉴욕 브루클린 대학(미대)에서 석사를 취득, 현재 롱아일랜드대학 교수로 있다.

그는 독특한 작업과 거기에 배어있는 삶의 편린들로 인해 줄곧 주목받았으며, 미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20회 이상의 개인전과 70회 이상의 단체전은 뉴욕타임스, 뉴스데이, 아트매거진 등 저명한 매체에서 평론을 받았다.

그런 그가 모처럼 고국을 찾아 전시를 열고 있다. 2004년 서울 우림갤러리에서 자신의 과거 작품을 모조리 가위로 잘게 잘라 유리병 속에 밀봉해버린 다소 충격적인 작품을 선보인 지 5년 만이다.

이번 장은선 갤러리의 전시는 드로잉으로 꾸며졌다. "5-6년 전부터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 삶과 관련 있는 것들에 자연성, 생(生)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어요."

작가가 과거 작품을 가위로 잘라 유리병 속에 밀봉시켰던 것을 드로잉으로 되살린 것은 끈질긴 자기애와 회귀의 본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작가의 존재성, 실존으로의 지향에서 발원한다.

그는 7살 때 부모를 따라 이민을 가 완전한 미국인도 될 수 없고 그렇다고 한국인도 아닌 경계인으로 커왔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

그는 버려진 기성제품이거나 남겨진 자신의 창작물을 재활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의 작업습관은 발견된 물건과 가공된 미술품 사이를 앞뒤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뉴욕의 택시운전사 시절 버려진 휠이나 부속품들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거나 그가 가르친 학생들이 버리고 간 캔버스를 재활용해 작업하는 식이다.

그의 작업은 마치 오브제의 경계를 깬 마르셀 뒤샹처럼 쓸모 없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해 창조성을 갖게 한다. 그러한 반복은 자아로 향하는 수련의 과정이다.

1-‘Night Tree’
2-Man with Umbrella’
3-'Plants'
4-‘Backlight’
1-'Night Tree'
2-Man with Umbrella'
3-'Plants'
4-'Backlight'

임재광 평론가의 분석처럼 이승의 작품세계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참모습을 되새기는 동양적 구도(求道)의 길을 연상케 한다. 잘게 잘라진 자신의 그림조각들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화려한 유리병 속에 넣고 밀봉하여 보관하는 것은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 유리병들을 전시장에 설치하여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하였다. 하버드대학의 미술사학자인 레이첼 바움 박사가 “이승은 부패, 파괴 그리고 재생의 순환과정을 불교의 깨달음의 순환으로 묘사하였다”고 한 의미이다.

이승은 지난 6월 한국에 도착해 40년 만에 자신이 7살까지 살았던 경기도 가평의 옛집을 찾았다. 이는 자기애적 회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번 전시에는 이민자의 디아스포라 단면들이 진하게 묻어난다.

우선 재생(Recycling)이다. 작품 ‘’Plants 2', 'Budding 2' 등에는 버려진 캔버스의 흔적이 뚜렷하다. 작가는 학생들이 버리고 간 캔버스는 가르침의 실패를 증명한다고 생각해 그 그림 위에 자신이 그림을 그려 실패를 보완하거나 덧칠함으로써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콘셉트의 발전이나 완성을 시도하였다. 미국 사회에서 작가의 경계인으로서의 존재 양태, 삶의 방식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장소(Location), 또는 지역의 면면이다. 작품 ‘Backlight 3', 'Hot and Cold' 등 전시작 중에는 무채색 또는 흑갈색을 사용한 것이 많다. 이러한 색채는 현재 그가 살고 있는 뉴욕 브루클린 거리의 주조색이다. 또한 그림에 사용된 스텐실이나 스프레이 기법은 낙서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법으로 브루클린이라는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다음은 정체성(Idenity)으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사회다. 이승의 작품세계는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고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는 이민자로서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성찰이며 탐구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표제를 “순환(循環, circulation)”으로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작가는 작품 ‘Night Tree'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는 재생, 지역, 정체성 세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 자신도 한 줌의 자연으로 돌아가겠죠. 결국 삶이란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임재광의 말마따나 자연으로부터 출발한 사물이 용도를 다하여 버려지고 다시 그의 손에 의해 미술작품이 되었지만 그 작품 또한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이 브루클린이지만 그 또한 영원할 리 없다. 그는 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다시 찾았으며 또한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고 되살리는가? 모든 것이 순환의 과정에 불과할 뿐임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계속 가야만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그의 작품은 소리 없이 전하고 있다. 8월 14일까지 전시. 02)730-3533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